降臨 #4: 혁명가와 혼혈아

#4: 혁명가와 혼혈아. ((퇴고일: 2008. 7.7))

 베드로의 현신은 학교 건물 뒤쪽 으슥한 자리에서, 점심도 먹지 못한 채 네 명의 친구들에게 신나게 얻어맞는 중이었다. 베드로는 중산층 가정의 유복한 아이로 구김살 없이 순진하게 자라났고 교우 관계도 원만했으며 성적도 괜찮은 아이였다.
그런 베드로가 친구들에게 맞는 이유를 말하자면 원만하다는 말의 뉘앙스를 살펴야 한다. 세상사람 모두가 알듯이 만약 담임교사가 성적표의 활동 발달란에 '이 학생은 교우 관계가 원만하다'라는 말을 적어놓는다면 그것은 교사가 인지할 수 있는 영역에 한정된 관찰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완벽히 좋은 교우관계가 아닌, '예외는 있으나 대체로 좋은 것'을 의미하는 셈인데 베드로에게는 이 네 학우가 바로 예외에 해당했던 것이다.

 "야, 이 찐따 새끼야. 얼마 안 되는 돈 하나 제대로 못 맞춰?"

 네 친구와 베드로의 관계는 여러 예외적 관계 유형 중에도 일종의 조공 관계에 해당했다. 조공 물목을 맞추지 못하면 으레 벌어지는 상국의 행패. 베드로는 사대 관계에 익숙했던 선조의 아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도 있었다. 또한, 이 다섯 아이가 C.A로 역사연구반 활동을 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으로 네 아이는 특정한 경제적 이론의 신봉자이자 역동적인 혁명가일 소지가 있다. 소득이전을 통한 부의 재분배로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은, 부자의 1원과 빈자의 1원의 가치를 달리 보는 것으로써 가능하다. 민주사회의 문명화된 정부는 이런저런 합의를 도출하느라 이런 쟁점을 해결하는데 지지부진하지만, 초등학교의 세렝게티라면 사정이 다르다. 네 마리의 하이에나는 사자 한 마리가 먹을 양으로 함께 만족할 만치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만일 기성 질서가 조속히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다면 이 신세대 사상가들은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각기 다른 색- 정확히는 백색, 적색, 검정색, 청황색 -의 셔츠를 입은 네 친구는 베드로에 대한 구타를 잠시 멈추기에 이르렀다. 베드로는 유혈 혁명의 종결을 기대하며 슬며시 고개를 들지만, 네 친구는 그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동이란 대가도 없이 부모의 풍족한 부를 누리던 부르주아지가 공포 속에 네 사람의 혁명가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미, 미안해. 다음에는 잘 준비할게."
 "입 닥쳐, 병신아. 당장 오늘 발매하는 게임사는 데 돈이 모자라잖아.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아, 이런. 혁명은 혁명이되 변질된 혁명이다.

 아무튼, 서슬퍼런 목소리에 베드로는 다시 무릎 사이로 고개를 박았다. 누군가가 거북이처럼 움츠러든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질 때까지. 그리하여 이 이차원적이고도 본능적인 행동을 종결지어줄 때까지.
 손길을 구타의 전조로 생각했던 베드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것은 주먹이나 팔 따위, 원초적 폭력의 매개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아닌, 조그맣지만 부드러운 소녀의 음성이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뒤이어 빨간 티셔츠의 고함이 들린다.

 "어, 저 새끼는 또 뭐야?"

 베드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키 작은 여자 아이가 햇볕을 등진 채 베드로를 내려보고 있었다. 베드로의 낮은 눈높이 탓에 태양이 아이의 머리 뒤로 후광처럼 빛났다. 후광의 빛 사위가 드리워 넘실대던 얼굴의 그림자 속에서 베드로는 은은하고 자애로은 미소를 살필 수 있었다.

 "왜 여기에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어? 자, 어서 일어나."

 얼핏 보기로 2학년 즈음이나 되었을까. 왠지 슬퍼 보이는 눈에는 더불어 강단이 있었고, 대뜸 저보다 덩치 큰 고학년 학생에게 손을 내미는 동작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얼결에 손을 잡는 베드로가 아무런 수치를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사이 네 아이는 흉흉한 기세로 소녀에게 다가섰다. 검은 티셔츠의 아이가 소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자 베드로는 자신의 구원자가 해를 입지는 않을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야, 너는 뭔데 쓸데없이 참견질이야, 죽고 싶어? 이 시발녀..."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뜻밖에도 저 검은 티가 고개 돌린 소녀와 눈을 마주하더니 말꼬리를 흐려버린 것이다. 베드로는 검은 티의 표정 속에서 평온을 보았다. 그는 두려움에 경직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쓱싹하고 적의를 지워버린 것 같았다. 폭력과 광기의 감정이 끊임없이 꿈틀대던 그의 얼굴 위에 결코 어울리지 않을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그건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화분처럼 뒤늦게 소녀와 눈을 마주친 다른 아이들의 얼굴에도 번져나간다.
 소녀는 평온히 선 네 사람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어. 그런데도 오빠들은 공연히 마음이 앞서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네."

 소녀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교사로 이끌었다. 멍하니 선 네 아이의 시야로부터 벗어날 즈음에야, 베드로는 공연히 쑥스러운 마음에 소녀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소녀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돌아보자 베드로는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인사를 건넸다.

 "구해줘서 고마워."
 "뭘."

 소녀는 다가와 옷에서 흙과 먼지 털어내는 일을 도와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넌 누구니?"
 "나?" 베드로의 어눌한 목소리에 반해 소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쾌활하다. "난 정규리야. 2학년 1반. 오늘 여기로 전학 왔어! 오빠는?"
 "난 박대로. 5학년이야."

 이때 베드로는 규리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좀 전에는 경황도 없었거니와 규리가 햇볕을 등진 채로 첫 대면을 하여 잘 몰랐는데, 이렇게 나와서 보니 피부색은 조금 어둡고 얼굴의 느낌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낯선 느낌 속에 다가오는 경외감이랄까. 그런데 혼란스럽게 머릿속을 오가던 이 신비한 감정을 규리는 몇 마디 말로 일축해 버렸다.

 "오빠는 나 같은 사람 처음 보나 봐? 우리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라 그래."
 "아, 어. 어, 아니."

 '나 같은 사람'이라는 말로 규정된 그 괴리 탓에, 베드로는 자신의 무례한 시선에 소녀가 기분을 상하지는 않았는지. 당황도 하고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네게 느낀 신비한 감정들은 그저 혼혈이라 그랬던가. 그렇다면, 그리 신기하고 놀랄 일은 아니었는데. 베드로의 학교에는 이미 규리 같은 혼혈 아동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그리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규리는 그의 생각을 살핀 마냥 해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by Qui-gon | 2008/07/08 14:42 | [소설] 降臨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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