降臨 #2: 빌립보의 계시; 그에게 죄를 묻지 말라.

#2: 빌립보의 계시; 그에게 죄를 묻지 말라. ((퇴고일: 2008. 7. 8))

 적 그리스도는 몰랐지만, 사실 그에게도 몇 가지 행운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빌립보에 관한 것이다.
 과거 빌립보는 예수에게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제자였다. 오늘날 그의 어린 현신은 겨우 중학생에 지나지 않았으나 신앙과 합리적 사고 사이에 번민을 하기로는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는 어느 날 잠을 자던 중에 느닷없는 계시를 받게 되었다. 홀로 자던 작은 방은 어둠 속에서도 더욱 어둑해지다 천장 위로 한줄기 광휘가 비쳐들며 무겁고도 장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사명을 다 할 준비가 되었느냐? 답하거라.>

 빌립보는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으므로 돌연 잠에서 깨어 경황이 없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부터 이해하려 애썼다. 어째서인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기회가 한번뿐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다만 무슨 사명을 다하라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로 많은 회의와 번민 속에 교회 생활을 마감한 빌립보는 불현듯 이것이 악마의 목소리가 아닌가를 의심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은 생생한 지옥 얘기는 무의식 중에 교회를 나가지 않던 그에게 부당한 죄책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어리지만 합리적이었던 빌립보는 내용도 알지 못하고서 계약을 하는 것이 부당하다 여겼다. 흉흉한 세상의 뉴스마저 떠올랐다. 악마의 목소리는 교묘할 것이다. 저것이 신의 목소리를 가장해 내 쇠락한 믿음을 시험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빌립보는 본능적으로 반문했다.

 "그건 어떤 내용인가요?"

 " 빌립보가 생각한 대로 대답의 기회는 한번뿐이었고 반문은 그리 좋은 대답이 아니었다. 믿음이란 빈곤한 근거와 불신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을 때 오롯이 빛나는 것이다. 광휘와 어둠이 걷히매 방 안은 다시 평온을 찾았다. 이제 그에게 기회는 일 년 후에나 찾아 올 것이다. 주일학교의 목사가 이런 결과를 의도하고 지옥불과 악마로 어린 빌립보를 위협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찌 되었건 사도 한 사람의 합류가 늦어졌고 빌립보 스스로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당부하건대 우리는 목사를 탓할지언정 자세한 계약의 내용을 설명해주지 아니한 주님을 탓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보험사 직원이 아니며 (*주1) 셀 수 없는 세월동안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한결같이 그래 오셨으므로.
 노아와 짐승들을 구하고자 하셨다면 방주를 만들라 지시하는 대신 처음부터 완성품을 내려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을 사랑했다면 광야를 떠돌게 하는 대신 그들을 손수 교화시키고 “Beam them up, Gabriel!"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빌립보에게 편안한 시간을 골라 방문해 그가 행해야 할 일과 책임들에 대해 한 시간쯤 차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늘 그래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불친절을 탓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빌립보는 오밤중의 갑작스런 소동이 끝나자 조심스럽게 눈을 감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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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물론 모든 보험사 직원이라 하여 규약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들은 주로 형광펜을 사용해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고 가입을 권유하는데, 이때 보험 상품의 불리한 점에는 밑줄을 잘 긋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보험사 직원을 친절하고 꼼꼼한 설명의 대명사로 상정해 주님의 불친절과 대비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닐 수도 있겠다.

*주2) 스타트렉에서 물질 전송을 할 때 내리는 명령인 Beam me up, Scotty.

by Qui-gon | 2008/07/08 13:33 | [소설] 降臨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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