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16일
[엽편] 그녀를 사랑하다. (05.18 퇴고)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자동차 운전석의 사이드 미러를 통해서였다. 어느날 저녁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때,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로 얼핏 눈가를 스치고 지나간 그녀의 검은 눈매가 내게 묘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급히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였지?
내가 본 것은 얼핏 스친 그녀의 눈매뿐이었지만 나는 그날 밤에 그녀를 꿈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멀찍이 서서 날 바라보는 그녀가 그날 오후에 마주쳤던 이라는 사실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설 수 없었는데 내가 한 걸음 다가설 때에 그녀는 두 걸음을 떨어져 섰고 내가 달렸을 때에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꿈속에서조차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녀의 눈매뿐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나에 대한 그녀의 의미와 그리움을 확인하여 그 것을 더욱 애절하게 만들고 말았다.
오직 눈매만을 기억하던 그녀에 대한 내 상사(相思)는 차츰 내 일상생활을 잠식해갔다. 나는 숙면을 취할 수 없었고 밥맛은 떨어졌으며 업무에 대한 열의도 식어갔다. 그녀의 눈매를 잊지 않으려 애쓰던 나의 노력은 업무 보고서에도, 책상 위에도. 그녀의 눈매를 마치 몽타쥬의 한 부분 마냥 세밀하게 남겨놓곤 하였다.
공연히 타박 놓을 거리가 없나 둘러보던 테리우스 김이 대뜸 내게 화를 낸다. 테리우스, 테리우스, 히스테리우스. 우리는 김 차장을 그렇게 불렀다. 히스테리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사람이었고, 지난 번 술자리에서 끈적하게 달라붙는 것을 냉정하게 뿌리친 이후로 내게는 유독 심한 히스테리를 부리곤 하였다.
그런 히스테리에 불쾌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멋쩍게 웃으며 설설 기던 나는, 그 날에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이 아파 조퇴해야겠어요."라는 말 한마디를 던진 채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내 말에는 분기(憤氣)도 없었고 짜증도 없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던진 말 한마디는 김 차장의 사고를 경직시켰다. 그가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 짧은 순간에 이미 나는 사무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화기 배터리를 빼놓는 일이었다. 이로써 김 차장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그리고 머리 가득한 그녀에 대한 생각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휴식이었다. 가까운 찜질방에라도 가서 쉴까.
엘레베이터로 몇 사람이 함께 탔지만 나는 그들에게도 양 옆의 거울로도 시선을 주려하지 않았다. 19층. 18층. 17층. 16층. 15층에서 몇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14층… 13층… 액정판의 붉은 숫자가 미련없이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1층에서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나설 때에 나는 문득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의 눈매를 보았다. 끝자락에 보였던 긴 머리칼. 엘리베이터 문을 나선 나는 잠시 혼란스럽게 서 있었다. 내가 본 게 그녀야? 그녀의 눈이지? 그녀가 같은 회사 건물에 있었어?
나는 달렸다. 따각따각. 구두발굽 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아저씨, 혹시 방금 이 쪽으로 머리 긴 여자가 나가지 않았나요?"
평소 데면데면 인사를 나누던 수위 아저씨가 대뜸 물음을 던지는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무슨 일이우? 혹시 저기 가는 저 사람은 아녀?"
수위 아저씨가 가리키는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건물을 나서 어느새 택시를 잡던 긴 머리의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차분한 검정 투피스의 긴 머리 여성. 나는 회전문을 거칠게 밀어 젖히며 달렸다.
"저기, 잠깐만요!"
그러나 택시는 무심히 떠나갔고 그녀도 함께 눈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망연자실 그 택시가 가는 양을 지켜만 보았다. 아, 만일 내게 병적인 몰입이 없었다면. 그리하여 수면을 충분히 취할 수 있더라면. 아마 나는 뒤따르는 택시를 잡아 그녀의 뒤를 쫓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때에는 그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를 놓쳤다는 망연함이 내 발목은 물론이거니와 내 사고 장치에 마치 걸림쇠라도 걸어놓은 것만 같았다.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옥외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온 나는 문을 잠글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회사에서 왔을 것임 틀림없는) 전화기의 끊임없는 벨소리 속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 병신. 왜 따라갈 생각을 못했어, 이 등신아. 나는 어린애라도 된 마냥 처량하게 울다가 전화선을 뽑아들었다. 미친 히스테리우스. 네 목소린 듣기 싫어.
크리넥스 티슈를 뽑아 팽하고 코를 푼 나는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렸다. 내 얼굴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집의 창이란 창마다 블라인더를 다 내렸다. 옷을 벗었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뉘었다. 눈물을 오래 흘린 탓인지 짜내고 짜낸 눈은 안압이 높아진 듯 욱신거렸고 그 뒤로 신경을 타고 넘어 뇌까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수면 부족이 한몫을 했을 그 현기증 속에서 나는 내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났는지를 계산해본다.
그 눈매, 그 머리칼. 내가 본 것은 또 없었던가?
그렇게 흘려낸 눈물과 고통이 조금은 자극이 되었던 것일런가. 나는 욕조로 가득히 차오르는 물 속에서 그녀의 가는 목과 동그란 얼굴선을 어렴풋이 기억해낼 수 있었다. 어느 덧 욕실의 큰 거울은 뜨거운 수증기에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고 조금은 숨이 갑갑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조금은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나는 기분 좋게 욕조 안 따스한 온기 속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녀가 우리 회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우리 집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집 앞에서 기다리다보면 혹여 그녀를 볼 수 있진 않을까? 지금이 몇 시지? 퇴근 시간이 지났나?
내 마음이 다시 조급해지고 있었다. 나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나왔다.
너무 늦진 않았겠지? 지금 나가면 늦진 않겠지?
그리고 그 때에 나는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수건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욕실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문을 잠그지 않았다.
하지만 왜 그녀가?
저 뿌연 김 너머로 드러나는 저 윤곽에는 내가 기억한 그녀의 가는 목선과 동근 얼굴선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울 위에 뿌옇게 서린 김을 닦아냈다. 그녀의 눈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 눈이었다. 이제 나는 두 손으로 거울을 닦아낸다. 물에 젖은 채 길게 드리운 머리칼, 애처롭고 놀란 눈으로 나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련한 눈매였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나는 그녀에게로 손을 뻗지만 작은 유리 하나가 닿지 않는 이상향과 현실의 작은 간극을 만든다.
"난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 것은 짝사랑이었다.
거울 속의 나를 사랑하는 나는 거울 속에서 거울 속의 나를 사랑하는 거울 속의 나로 남게 될 뿐이었다.
만일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나를 사랑할 뿐이고,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거울 속의 내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연결점이 없는 타자로 남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이를테면 영원한 짝사랑을 통해서만이 그녀와 연결된 감정의 고리를 놓지 않을 수 있게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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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판타지 한시간 대회 2위.
# by | 2008/05/16 10:22 | [소설] 그 외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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