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전 영화 몇 편에 대한 짤막한 감상. [리뷰] 각종 리뷰

 지옥화, 천년호, 시마론, 그랜드호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위대한 지그펠드에 대한 감상문 재중.




1. 지옥화 (1958)

 신상옥 감독의 작품. 신상옥 감독은 우리에게는 영화광인 김정일의 지령으로 78년 북한에 납치되었던 영화계의 거성으로 더 친숙한 이름이다. (물론, 후일 북한에서 탈출했고, 작년에 타계했다.) 지옥화에는 신상옥 감독의 부인인 최은희 여사가 출연했다. 
 옛 영화이니만큼 우리의 시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연출로 점철되어 있지만, 담겨있는 이야기 자체는 제법 흥미롭다. 재물에 대한 욕심, 자유분방한 성을 즐기는 악녀 이미지의 양공주, 건달들, 건달이 된 형을 고향으로 데려가려 하는 갓 제대한 순박한 시골청년.
 58년을 살지는 못했으나, 그 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여러 삭막한 정경들.
 처한 상황을 즐기는 여인과 그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하는 여인. 이는 어찌보면 새로운 문화와 전통적 문화의 갈등의 측면일 수도 있다. 그녀들의 삶을 비교적 담담하게 조망하던 신상옥 감독이 마지막에 일종의 팜므파탈이라 할 수 있는 최은희를 죽인 것은 그의 짧은 생각과 의도도 엿볼 수 있을 듯 싶다. (좀더 명확히 해두자면 난 신상옥 감독이 이 새로운 사고의 여성에 대해 그리 적의가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것은 관객이 바라는 결말이었으리라. 당시의 관객들이 형과 아우를 건드리는 관능적이고 뱀같은 여인의 해피엔딩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극적인 결말과 함께 작은 이해와 희망을 안고 양공주였던 여인과 고향으로 돌아가던 시골청년의 모습이 짤막한 여운을 남긴다.



2. 천년호 (1969)

 역시 신상옥 감독의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정준호 주연의 동명 리메이크 영화로 더욱 친숙할 듯 싶다. 69년 당시 한국 영화의 기술적 한계가 가끔 눈에 띈다. (이를테면 무열왕의 전설을 말하던 노인의 회상에서, 무열왕의 이야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지는 듯 싶다가 막상 무열왕이 천년 묵은 여우와의 갈등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즈음에는 필름이 뚝 끊기며, 노인의 몇마디 말로 마무리된다. 내가 본 것이 필름의 중간 부분이 유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공포 분위기는 주로 조명과 울리는 목소리를 이용한다. 가만히 이 이야기를 짚어보면 슬쩍 오싹한 느낌도 든다.
 효과는 거의 없지만, 작품의 퀄리티는 후대의 작품보다는 이 쪽에 더 높은 평가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진성 여왕 - 김 장군 - 여와의 삼각 관계에 대해서도 이 쪽이 좀더 심층적이며, 그로 인한 갈등 관계의 발전도 보다 개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 눈치챘겠지만 나는 리메이크 작을 그리 재밌게 보지 못했다.

 밤에 지나치게 조명이 밝았는데, 중간 중간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후대에 보정 작업을 하며 실수를 한 듯.



3. 시마론 (1931)

 4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짧은 역사를 지닌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신화와 전설, 영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되는 작품이었다. 나는 이런 것이 적잖은 편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경계하는 축이지만 (모 영화 관련 강의에서 지나치게 이 견해에 치중되어 모든 영화의 사소한 요소까지 미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시마론에서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미국인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신화와 전설, 영웅 만들기의 한 궤적을 바라보게 된다. - 실제 영화에서 변호사 겸 신문발행인 겸 뛰어난 총잡이인 그가 개척마을에서 사람들의 요청으로 첫 예배를 주관하는 장면은 미국과 주인공을 동일시하며 거기에 여러 상징들을 오버랩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후에 알아보기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옌시 크래버라는 인물을 상정하여 미국인의 개척 정신과 정의를 부여하고 있다. 지나치게 윤색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겠지만, 나는 옌시 크래버라는 인물이 보여주던 그 역마살, 개척과 모험, 올바른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이 오늘날의 미국을 이끌었다는 것을 폄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공을 이뤄도 만족하지 못하고 가족을 둔 채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는 그의 삶은 조금은 초라하지만  영웅적인 죽음으로 마무리되고 자국민들에게 안주하지 않는 개척정신이 발전의 원동력임을 일깨운다. 근래의 반미 기류와 적대감이 강한 상황에서 이 영화는 어떤 이들에게는 거북할 공산이 있다.

p.s 주인공 리처드 딕스가 조금 느끼하게 생긴 것은 그 외의 사람들에게도 같은 결과를 유발할 수 있음.


4. 그랜드 호텔 (1932)

 5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독일 베를린의 그랜드 호텔에서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여 이야기를 펼쳐내간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시공을 초월하여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 곳에 짜임새 있게 담겨있는 인간애 덕분이다. 몰락한 귀족 사기꾼과 옛날의 영예를 잃어가는 무용수, 사랑을 알지만 돈에 대해서도 잘 아는 속기사, 사망선고를 받은 샐러리맨이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이야기는 유쾌하게, 차분하게 비극으로 흘러간다.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사랑을 하게 된 남작의 변화와 행동은 보는 이의 가슴을 조여든다.

 영화의 말미 새로운 인물들이 호텔을 찾는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서 얼굴에 흉칙한 화상을 입은 외과의사는 영화의 초입과 말미에서 짤막하고 역설적인 대사를 통해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일깨운다.

 "그랜드 호텔... 사람들은 오고 가는데 생전 아무 일도 없어."

p.s 자료를 찾아보니 그랜드 호텔의 연출 방식은 후에 <그랜드 호텔 방식>이라는 이름으로 정립되었다고 한다. 제한된 시간과 장소 내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영화 방식을 일컫는다.


5.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1934)

 이번에는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유쾌한 로맨스 영화다. 거장 프랑크 카프라 감독의 작품. 이 감독의 작품이라면 <스미스 씨 워싱턴 가다>라는 작품이 가장 친숙하다. 이 작품은 단편 소설을 영화화하여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줄거리는 제법 단순하다. 결혼을 반대하는 백만장자 아버지를 피해 달아난 철부지(? 사실 그리 철부지는 아니다.) 여성이 얼마 안되는 돈으로 뉴욕까지 약혼자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 여인은 명퇴 위기에 처한 기자와 야간 버스에 동석하게 된다. (그래서 원전 단편 소설은 제목이 '야간 버스'인 듯.) 기자는 매너도 좋고, 유쾌하고, 인간적이다. 그는 이 여성이 백만장자의 딸인 것을 알고 경찰과 탐정들의 추적을 피해 뉴욕까지 가는 것을 돕고 대신 그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독점 기사를 요구한다.

 눈치 챘겠지만... 그렇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고, 어느 한편이 다가설 때는 어느 한 편이 물러선다. 이윽고 둘이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이런 영화가 늘 그렇듯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려버린다. 그리고 역시 이런 영화가 늘 그렇듯 결말은...

 이 영화는 거의 매순간 유쾌하며, 연출과 대사, 상황 역시 지금의 눈으로 봐도 세련된 느낌.
 스크루볼 코미디(위트있는 대사와 갈등으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해피엔딩을 내는)의 원조격이라고 한다.


6. 위대한 지그펠트 (1936)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다. 눈치 챘겠지만 요즘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감상을 해보고 있다. (참고로 위대한 지그펠트는 수상작의 자격이 없다고 욕을 먹는 작품이기도 하다.)

 판타지 팬들은 제목을 보고 혹시 이건 판타지 영화인가보다 할 수도 있겠다.
 아니다. 실존 인물에 관한 영화이다.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쇼 연출자. 플로렌스 지그펠트에 관한 얘기이다.

 지그펠트는 세속적이다. 그는 음악 교수인 아버지 밑에서 음악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언제나 바깥 세상에 마음이 열려있다. 화려하고 멋진 쇼에 대한 갈망. 지그펠트는 기회주의적이다. 그를 조롱하면서도 언제나 당하는 평생 친구 빌링스에게서 여러 기회들을 뺏어와 그 것을 그 기회 이상으로 발현시킨다. 그는 위대한 쇼 제작가였지만, 시마론에서 보여지는 앤시의 영웅적인 모습은 없다. 그는 낭비벽이 심하고 허영심이 있으며 여성편력이 심해보이는 솔직한 남성이다. 그 낭비벽으로 인해 시시때때로 빈털털이가 되지만 그는 언제나 굴하지 않고 유쾌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화려한 쇼의 이면에 걸친 갈등과 인간애사처럼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처연하며, 때로는 비극적이다.

 영화는 화려한 쇼와 그의 인생을 지나간 아름다운 배우들로 화면을 가득 메운다. 영화에서 그가 겪는 위기는 한 손으로 세기에는 모자랄 정도이지만 언제나 굴하지 않고 재기하는 모습이 즐겁다. 물론, 인생의 끝은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덧글

  • 예니체리 2008/02/02 21:59 # 답글

    옛날영화는 별로 본 게 없는데 좋은 정보네요.
    그랜드호텔방식이란 말을 들은 게 큰 수확이네요.
  • 탄소 2008/02/03 12:42 # 답글

    저기 언급된 영화중 유일하게 본건 그랜드호텔 뿐이군요. 재밌게 봤던 영화였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