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의 역사] 페니키아와 그리스, 로마 下 [번역] 범선의 역사


범선의 역사
페니키아와 그리스, 로마 (2) written by qui-gon

* 이 글은 http://quigon.egloos.com의 출처와 이 글이 참고한 문헌 목록을 함께 밝힌다는 전제 하에 글의 복사 및 변형 게제를 허락하며, 상업적 용도로의 이용을 금지합니다. 다른 곳에 게시하실 때는 댓글로 남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가 서있던 기원전 300년 경에 그리스 인들은 더 이상 지중해의 가장 중요한 해상패권국가가 아니었다. 그 위치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방의 페니키아 식민지의 손에 넘어갔으며, 곧 이는 다시 로마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우리가 포에니 전쟁이라 부르는 두(세) 차례의 대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중 어느 쪽이 패권을 쥐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바와 같이 카르타고는 일차 포에니 전쟁 이전에 매우 강력한 함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해상도시는 요새화된 내륙 항구를 건설하기에 이르렀으며, 용병을 중심으로 운용되는 카르타고는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스토리채널에서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듯, 로마의 인내심 있는 도전 속에 지친 카르타고의 의회는 항복을 선언하고 함대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로마는 제해권을 장악했고, 코르시카 섬과 시실리 섬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한니발의 이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별개의 시도가 이뤄질 수 없었다.


 우리가 이제 살펴볼 것은 이 전쟁에 참가한 기원전 3세기 경의 갤리선들에 관한 것이다.

 기원전 300년의 트라이림들은 보다 강력한 유형의 함선들에 의해 대체되고 있었다. 시실리에 위치한 시라쿠스의 그리스 인들에 의해 기원전 400년 후 즈음부터는 일부 쿼드러림(4단 노선)과 큉커림(5단 노선)이 건조되었으며, 기원전 330년경에 이르러서는 아테네인들에 의해서도 건조가 되고 있었다. 금세 갤리선들은 15 뱅크짜리 배들이 주종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제 이러한 함급의 배들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 배의 노잡이들이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일 것이다. (사실 필수불가결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로몰라와 앤더슨은 이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노의 배치가 왜 이리 중요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트라이림에서 이 문제는 어느 정도 간단(?)했는데, 이는 모두가 한 사람이 한 노를 저었다는데 동의하는 까닭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람들과 그들의 노를 어떻게 배열할 수 있었는가를 거기에 있는 어떤 증거들로 가능성을 점쳐보는 일 뿐이었다. 많은 뱅크(*역주: 벤치의 의미도 있고 한 줄로 늘어선 노단을 의미하기도 하며, 노젓는 사람의 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를 가진 갤리들은 이 문제가 보다 복잡해진다. 


 이 주제에 관해 연구한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의 노단 위에 다른 노단을 더하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다섯 개의 노단까지는 가능성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면 정말로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10뱅크짜리 배는 열 개의 노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 하나에 열 사람을 배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쉽게 말하자면 다섯 개의 노단을 넘어가는 단위에서는 그 숫자가 노단의 숫자가 아닌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는 것이다.


 보다 그럴싸한 이론은 한 묶음의 노에 배치하는 사람의 수로 센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라이림의 노는 세 개의 노를 한 묶음으로 열을 이루는데 각 노에 한 사람씩 세 사람이 배치되는 것이다. (그림에 소질이 없어, 조악한 이미지로 내용 설명을 보충함. 양해와 자비를.)


 만약 맨 윗 열의 노에는 한 노마다 두 사람을 배치시킬 경우, 한 묶음에는 네 사람이 있게 되며, 그 배는 쿼드러림이 되는 것이고, 여기에 가운데 노에도 한 사람을 더 배치한다면 그 배는 한 셋에 다섯 사람이 배치되어 큉커림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세 개의 층으로도 6 뱅크짜리 배가 등장할 수 있고, 네 개의 노단을 갖춘 배에서는 10 뱅크나 11 뱅크짜리 배도 등장할 수 있다. 다섯 개의 노단을 갖춘 배에서는 15 뱅크 또는 16 뱅크의 배가 나오는 것이다. 이 것을 넘어서는 실제로 항해한 배가 없었고, 16뱅크짜리의 마케도니아 배로 불리는 Livy는 “그 배의 크기는 쓸모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림으로 설명을 했지만, 앞서의 내용과 헷갈리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정리해본다. 역자는 잘 모르겠지만, 주요 참고 자료의 저자가 중요하다니 꼭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아서 그런다.


 ① 옛 배들을 나타내는 용어로 갤리선, 바이림, 트라이림, 쿼드러림, 퀑커림 등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것이 각각 한 층짜리 노선, 두 층짜리 노선, 삼 층짜리 노선, 사 층짜리 노선, 오 층짜리 노선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② 그런데 문제는 기록상에 존재하는 10단 노선, 40단 노선 따위이다. 이 것은 구조적으로 도저히 가능하지가 않았다.


 ③ 그래서 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새로운 이론이 제기되었다. 만약 3층짜리 노선이라고 가정하면, 한 열의 1, 2, 3 층을 노 세 개를 한 묶음으로 가정한다. 바이림, 트리이림, 쿼드러림, 퀑커림이 나타내는 2~5의 숫자는 각 묶음의 노에 투입되는 노잡이의 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었는가? 아무튼 각설하고.


 카르타고 인들은 천성적으로 그들의 모든 존재를 바다에 의지하는 해상 민족이었다. 반면에 로마인들은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바다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로마가 호전적인 성격대로 군사력을 증강하고 세계로 손을 뻗는 중에 맞닥뜨린 것은 바다의 왕자 카르타고였다. 로마는 사실상 4년간의 첫 포에니 전쟁을 치르기 전까지 바다에서 적과 싸움을 벌여본 경험이 없었다.

 양측은 큉커림을 그들의 주력함으로 하여 전투를 벌였고, 로마인들은 상대의 배로 건너가기 위한 가교의 일종인 ‘까마귀(Corvus; 코르부스)’를 개발. 부족한 해전의 기술을 육박전을 통해 커버하려했다. 역사가 말하듯 이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까마귀는 성공적인 발명이었던 것이다.


 가외로... 프랑스의 역사학자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명장 한니발의 조부였던 한니발(이하 할아버지 한니발)은 로마의 함대를 만났고, 그들이 어떤 유형의 새로운 기구를 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함대를 우습게 본 그는 섣부르게 공격을 명령했고 여러 척의 배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남은 함대를 이끌고 달아났는데, 누군가가 그의 패배를 알게 되기 전에 카르타고로 돌아갔고, 관리를 보내 로마인들이 해양에 함대를 갖게 되었음을 알리게 하였다. 할아버지 한니발은 로마 함대의 첫 출현과 그들이 바다에 대단히 익숙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였지만, 사용목적을 알 수 없는 기계들을 싣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에 할아버지 한니발은 그들을 공격했어야 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묻고 있지만, 그 서신에서 그는 교묘하게 자신이 이미 공격하였음을 암시하고 있고 그렇게하여 패배도 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대놓고 졌다고 말하기가 쑥스러웠던 듯 하다.)


 여하튼 로마인들은 항해술이 뒤떨어져 카르타고와의 전쟁 중에 함대를 여러 차례 잃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꺾일 줄을 몰랐다. 그들은 함대가 파괴되면 끈기있게 재건했고 다시 도전했다. 종국에 그들의 불굴의 노력이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로마도 카르타고도 크게 지쳐있었고 존망의 위기에 빠져있었는데 결국 먼저 손을 든 것이 카르타고였다.

로렌조 A. 카스트로의 1672년작. 『악티움의 전투』
qui-gon의 2007년작. 『퀑커림』 (아놔...)



 일차 포에니 전쟁 중에 갤리선의 디자인에 있어 변화가 있지는 않았을까?
 한 독일인 저작자는 이 주제에 대해 최근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어놓았는데, 제법 설득력이 있다. 그가 말하는 변화는 가장 하단의 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다른 두 층의 노들에 두세 사람이 각각 배치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것은 새로운 체계하의 퀑커림으로 보다 가볍고 조종하기 쉬운 배가 된 것인데, 이러한 새로운 건조 방식을 ‘리부르니안(Liburnian) 방식’이라 불렀으며, (*역주: 리부르니안은 민첩한 2단 노의 갤리선으로 악티움 해전에서 로마군의 주력 함종이었다.) 이 방식의 함선은 오랜 기간 이전의 바이림, 트라이림, 쿼드러림 등의 함선들과 함께 공존해오다가,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을 계기로 대종을 이루게 되었으리라 보고 있다.


 악티움 해전이 승리 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건설된 프라이네스테(Præneste *역주: 이탈리아 고대 국가인 라티움의 도시로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 프리미게니아 신앙의 중심지였다.)의 포르투나 여신의 신전에서 발견된 조각(Fig.19). 이 조각에는 리부르니안 원리로 건조된 큰 갤리선이 새겨져 있다. 이 것은 바이림(2단 노선)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은 그보다 높은 함급의 배를 표현하고 있다. 

 일부 저술가들이 단지 장식일 것이라 믿어왔던 아우트리거의 윗부분은 실제로는 맨 윗층 노단의 노 밑동이거나 노단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여기의 노가 실제로 한 줄이었는지 두 줄이었는지를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 하겠지만, 그 중 가장 적절한 설명은 조각을 새긴 예술가가 두 번에 걸쳐 새겨 넣기에는 노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낮은 두 줄의 노단은 표현이 불가능해 한 층처럼 보이게 배열이 되었을 것이다. 즉, 두 층의 노가 서로 겹쳐 조각에서는 맨 아래 줄의 노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장 하단의 노는 배의 실제 옆면으로 나와 있고, 그 윗줄의 노는 아우트리거의 아래쪽 측면에 노 구멍으로 나와 움직였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낮은 두 층의 노단에는 한 노에 각 두 사람이 배치되었을 것이고, 아우트리거의 가장 윗줄에는 노 하나에 세 사람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배는 셉트리미(septreme; *역주 7단의 노를 갖추었다는 의미. 여기에서는 한 열의 노잡이가 아래층 2인, 가운데 2인, 아우트리거의 3인으로 총 7인임을 뜻함)로 로마 함대의 기함이었을 것이다.


 한편, 그리스와 로마는 그들보다 앞서 크레타인들이 해왔던 것처럼 노로 움직이는 전함과 돛에 의존하는 상선들을 명확하고 단단한 선들로 그려냈다. 갤리선이 배한복판에 사각의 돛을 달고 있었고 아마 그 외에 앞 쪽에 매우 작은 돛을 달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에 있어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리고 상선은 아마 드물게 노를 사용하였고 주로 돛에 의존했을 것이다.
 좀더 일반적으로 양자간의 특징은 대단히 명확하여, 매우 이른 초기로부터 선체에서 보여지는 대단히 큰 차이점은 전투 용도와 속도를 중시해 건조한 갤리가 길고 가는데 반해, 상선은 짧고 뚱뚱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스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상선의 외양에 대한 약간의 증거들을 남겨주었다. 갤리의 우아한 형태와 보다 생기 있는 활동은 그들에게 훌륭하게 어필한 듯 하다. 기원전 500년경의 상선(Fig.20)을 예로 들면 이 상선의 그림은 Fig.14의 조각과 같은 도자기에서 나온 것으로, 롱쉽과 라운드 쉽의 차이를 참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 배는 갤리선보다 높낮이가 긴데, 하나의 큰 돛이 달려있고 노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고대의 배들처럼 이 배는 양 옆으로 방향타(rudders) 한 쌍을 갖고 있지만, 뱃머리는 완전히 현대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배 중앙 옆면 위의 무늬는 화물을 임시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집트의 페니키아 상선 그림에서도 언급된 바가 있다.
 
 긴 사다리처럼 보이는 장치의 목적은 명확하지가 않다. 아마도 이 것은 갑판 위의 차양막일 것이라 짐작을 할 뿐이다. 선미의 짧은 사다리는 항만에 있을 때 사용되는 현문(*선박의 출입구)이리라 생각된다.


 로마의 상선은 보다 육중해보이지만, 단지 그림이 아닌 조각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Fig.21의 그림은 서기 50년경의 것으로 폼페이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으며, Fig.22의 그림은 서기 200년경의 조각으로 티베르 강 입구의 로마 항구인 오스티아(Ostia)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두 조각의 배들은 높은 선미와 비교적 낮은 뱃머리를 보여주고 있다. (Fig.21의 경우 좌측이 선수, 우측의 백조장식이 선미이며, Fig.22의 경우에는 우측이 선수, 좌측의 백조모양 장식이 선미이다.) 배 중앙의 돛대에는 큰 사각 돛이 걸려있고, 보다 작은 돛이 선수에 경사지게 걸려있다. 이 돛은 다른 자료로부터 알 수 있는데, ‘아르테몬’(artemon)이라 불리는 것이다.

(* 아르테몬은 추력을 얻기 위한 돛이라기보다는 방향 조정을 돕기 위한 보조 돛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편, Fig.21과 22에서는 지삭(*역주: 돛대를 고정시키는 굵은 밧줄)과 돛대밧줄, 돛을 한데 모으기 위해 죄어주는(brails), 높은 수준으로 발달된 체계의 장치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Fig.22에서는 메인세일(main sail *역주: 배의 중심 돛대main mast에 달린 돛 중 가장 하단에 자리잡은 돛. Fig.21에서는 커다란 사각 돛이 메인세일이 된다.) 위에 자리 잡은 삼각형의 탑세일(top sail)도 살펴 볼 수 있다.

 같은 조각에 있는 다른 배에는 돛이 없는데, 나무로 된 큰 사각 블록의 마스트헤드(masthead *돛대의 꼭대기)에서 활대를 끌어올리기 위한 밧줄이 나와 있다. 이 것은 13세기 동안 지중해의 다른 배들에서도 발견되는 구조이다.

 사도 바울이 말타에서 조난 사고를 당했던 것도 이러한 배인데, 이러한 배들은 아마도 그 길이가 백 피트를 넘었던 것 같다.


(『서간을 작성중인 사도 바울』 발렌틴 드 블로뉴의 1962년 작. 사도 바울은 예수 사후,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행을 다녔는데 그가 돌아다닌 거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지방으로 이동하는 수단으로 주로 배를 이용하였다. 그가 남긴 배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정밀하여 오늘날의 연구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선미의 높이는 그들이 왜 선수 대신 선미에 닻을 달았는지를 설명해준다. 해안가에 도착하기 전까지 느슨하게 조여져있는 방향타 줄(rudder-bands)은 방향타가 물 밖에 있도록 당겨주는 밧줄이었다. 배가 거친 바다에서 정선해있는 동안 방향타를 내려놓거나 풀어놓을 수 없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인증된 판본의 성경은 배가 해안가를 달릴 때 “메인세일(mainsail)”을 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데 이 것은 번역상의 실수로 실제 원문의 단어는 메인세일이 아니라 ‘아르테몬(artemon)’으로, 선수 바로 위에 달린 작은 돛대의 포어세일(foresail *역주: 메인 마스트의 앞 쪽 돛대에 설치된 돛)이었다. 이 것은 바람 앞에서 배의 방향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보통 아르테몬은 배의 방향을 보다 쉽게 조종할 수 있도록 돕는 작은 돛이다.

 때때로 아르테몬은 배의 뒤쪽에 거의 메인세일만큼 커다란 크기의 돛으로 설치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경우는 카르타고 부근 우티카(Utica *역주: 현 북아프리카 튀니지 마자르다 강 어귀에 자리 잡은 페니키아인들의 가장 오래된 도시)에서 발견된 서기 200년 경의 조각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Fig.23 참조.) 이 것은 사실상 두 개의 돛대를 단 배로 볼 수 있는데, 두 개의 돛이 동일한 주요성(*주: 두 개의 돛이 메인세일과 포어세일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등함을 의미)을 갖고 있다.


 서기 50년경의 지중해 상선에 대한 좋은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해양 고고학자인 쥘 솟따(Jules Sottas) 박사에 의해 구분되어진 모델을 공부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여기에 관한 대한 자료는 우리가 살펴 본 세 개의 조각만이 있는 것은 아니며 다양한 중요성의 다른 많은 자료가 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생전에 행한 마지막 여정의 기록은 그 시대의 배를 매우 완벽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이 고대 지중해의 배들이 어떻게 함께 공존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페니키아인들에 관해서는 알려지고 있는 바가 전혀 없고, 그리스와 로마의 배는 일반적인 문학 내의 참고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의 배는 용골과 늑재로 건조되었으며 오늘날의 배 역시 그렇게 건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점들 있어 고대 이집트의 배들과는 유사점을 찾기 어렵다. 때때로 그들은 선수재(stem *역주: 배의 맨 앞쪽 끝이 되는 재목)와 선미재(sternpost)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얘기되기도 하는데, 용골은 양 끝에서 완만히 곡선을 이루며 갑판 높이로 휘어 올라갔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인식 하에서 용골이 갑작스럽게 꺾어지는 각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각 끝의 휨새를 포함한 전체 용골이 한 조각의 나무만으로 이뤄져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휘어진 부분이 직선 형태의 용골과 결합되어있는, 분리 가능한 부분이라는 것이 거의 정확한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비록 용골로부터 분리되는 부분에 대해 따로 명칭이 없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선수재와 선미재를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선체의 외판은 ‘캐러벨(Carevel *역주: 16세기의 작은 범선)방식’으로 부착되었는데, 두 개의 외판을 사개맞춤으로 고정하고 나무 핀으로 판을 고정하였다. 그리고 배 늑골재에 닿는 외판 부분은 동으로 만든 못을 사용해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 것이 사개 맞춤이다. 나무를 서로 맞물릴 수 있도록 홈을 파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연안을 항해하던 범선, 캐러벨. 만화 원피스의 고잉메리호도 캐러벨에 해당된다.)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웨스트미니스터 다리가 있는 템즈 강의 남쪽 강안에서, 영국 의회 홀의 기초를 위한 공사 중에 로마 선박의 잔해를 발견한 덕분이다. (그리고 이 것은 런던 박물관에 현재까지 보존되어있다.)
 
 연구자들은 이 선박에서 발견된 동전으로 이 선박이 브리튼이 로마의 지배를 받던 서기 260년 경의 배라는 사실과 로마의 조선 장인들에 의해 건조되었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 배가 어떤 목적으로 어느 지역에서 건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 배를 전투용 갤리선의 일부라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템즈강을 오가는 페리선이라고 생각한다. 이 배가 어떤 배였건 간에, 이 배에는 좋은 건조 기술이 집약되어 있었다. 이 배가 북쪽에 사는 사람들(그러니까 로마보다 북쪽에 살던 사람들)에 의해 건조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이 정도로 좋은 기술을 갖고 있었는지가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런 배를 건조할 능력이 없었다고 딱 잘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 장(章)에서 카이사르(Caesar; 혹은 시저)가 북쪽의 배를 만나 감탄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배가 운 좋게 보존되었던 템즈 강의 로마 배에 비해서도 그리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다음 글은 로마와의 접촉이 있기 전의 아일랜드와 브리튼, 스칸디나비아 등의 북구지역 배에 대해 짧은 분량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_^

덧글

  • 스케르초 2007/06/11 02:52 # 답글

    재밌게 읽었소~♡
  • Qui-gon 2007/06/11 05:02 # 답글

    감사합니다. ^^
    사실, 초벌을 그대로 올려 좀 거칠다 싶었거든요. 그래서 읽기좋게 수정을 했는데, 그 전에 먼저 읽어주셨네요. 오타가 많고 어법에 안맞고 지루한 부분이 많았을텐데 죄송합니다.
  • 우이힝 2013/12/09 23:05 # 삭제 답글

    학교과제로 퍼갑니다~ 확실히 남기겠습니다
  • 김정태 2014/02/27 16:30 # 삭제 답글

    주일신문에 원고게재하는 데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