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의 역사] 페니키아와 그리스, 로마 上 [번역] 범선의 역사


범선의 역사
페니키아와 그리스, 로마 (1) written by qui-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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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1000 B.C. ~ A.D. 400


 이집트인들과 크레테인들이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제해권을 빼앗길 무렵, 그리스는 지중해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해상민족이라는 페니키아인들은 분명 무역상과 바다의 전사로서 행한 업적들이 대단히 취급될만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들의 업적만큼이나 그들의 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에 대한 자료를 남기지 않았고 이집트나 아시리아(Assyria)의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들로부터 약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남긴 자료를 토대로 그 나라에 관한 내용을 추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떤 나라의 예술가가 다른 나라의 배의 외양을 신뢰성 있게 그렸으리라 보장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는 이미 앞에서도 얘기한 바가 있다.)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예술가들이 페니키아 선박이 이집트에 왔을 때 그 자리에서 보고 그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항구 마을에 살던 친구에게 얘기를 듣고 그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 것은 그리 신뢰성있는 자료는 아닌 셈이다.

 이런 연유로 페니키아의 배가 기원전 1500년경의 이집트 조각과 동 시대의 이집트 배와 지나치게 많은 유사점을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확실히 페니키아의 배들은 고정된 노가 없고, 그들의 화물을 보호하기 위한 갑판 사이에 개방형 방벽이 있었던 반면에, 선체와 범장에 있어서는 이집트의 배들과 똑같이 표현되어 있다. 물론, 이 것은 이 시기의 페니키아의 배가 실제로 이집트의 패턴을 모방하여 제작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것은 다음의 사례에 의해 증명되지 못한다.

 다음의 그림은 기원전 700년 경의 아시리아의 조각에 새겨져있던 것이다. 그림으로 볼 때, 이 배는 목재의 운반에 사용되었고, 선박에 적재한 목재와 별도로 뗏목의 형태로 배에 매달아 운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것은 250년 정도 앞서, 솔로몬의 성전을 건설하기 위한 목재 공급의 계획을 설명하는 성경 구절로부터 짐작해볼 수 있다. 튀루스(Tyre, 성경의 ‘두로’, 페니키아의 옛 항구도시)의 왕이며 페니키아 도시의 수장인 히람은 솔로몬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난 삼목과 전나무의 목재에 관한 그대의 모든 청을 수락하겠소. 내 신하들이 그 목재들을 레바논에서 바다로 이송할 것이오. 그리고 난 그것들을 내가 약속한 장소로 바다를 통해 옮겨가 하역시키겠소.”

 뗏목의 형태나 물에 띄운 목재는 배에 매달지 않고서는 바다를 통해 운송하기가 몹시 어렵지만, 배를 이용하면 잘 옮겨갈 수 있었다.

(* 성경에서도 언급되는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성전을 건설하기 위해 해로를 통해 목재를 운송해왔다.)


 그들의 독특한 화물과 별개로, 이들 배의 선수상이 말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눈여겨볼만한 것이 없었다. 말과 같은 선수상은 페니키안 류 배의 특징이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특징은 그들의 고향 항구에서 뿐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북부 해안의 Carthage와 스페인의 카디즈에 있는 페니키아인에 의해 건설된 여러 도시들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기원전 112년 경에 동부 아프리카에 떠밀려와 발견된 선수상은 카디즈에서 출발한 배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것은 카디즈의 페니키아 개척자들이 희망봉(the Cape)을 돌아 인도양을 항해한 증거로 보인다.
 
우리는 솔로몬 왕이 페니키아에 의해 부분적으로 지배를 받던 홍해에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 것이 페니키아의 형태로 건조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지만, 홍해에서 페니키아인들이 오랜 기간 영향력을 행사해왔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협력 관계였던 솔로몬과 히람은 아라비아 남부의 어딘가에 위치했을 오빌(Ophir), 스페인 남서부의 다시스(Tarshish)와 거래를 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홀로 보다 멀리까지 나아갔는데; 그들은 브르타뉴(Brittany)와 콘월(Cornwall)까지 당도한 것이 분명하며, 어쩌면 발트해 (Baltic)까지도 나아갔을 지도 모르겠다. 이 것은 페니키아의 배와 바이킹의 배 사이에서 발견되는 외형상의 유사점을 설명해줄 수 있는데,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사실이다.

 한편, 카르타고인들은 기원전 460년에 베르데 곶(Cape Verde;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곶)이나 그 부근만큼 멀리 나아가기도 했었고,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천오백마일 떨어진 블랑코 곶(서아프리카 해안 누아디부 지역) 부근에 무역 기지를 갖고 있기도 했다.

(*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투스)

 헤로도투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기원전 600년 경, 이집트의 왕인 네코(Necho)는 홍해의 한 항구로부터 페니키아 선원들이 함께 구성된 함대를 파견했고, 2년 이상의 긴 여정 끝에 그들은 지중해의 길을 통해 이집트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는 후일의 바스코 다 가마보다 2천년 이상 앞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것을 믿지 않지만 이 것이 사실이 아니어야 하는 적절한 이유를 본 적은 없다.


 기원전 약 700년경의 다른 아시리아 도기에서는 페니키아 전함의 외형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Fig. 10 & 11) 이 사례에서 이 도기에 그림을 그린 예술가는 자신의 분야에 정말 정통한 인물로 사료되는데, 페니키아의 다른 도시인 시돈(*역주 Sidon; 현재 레바논의 사이다Saida로 예수님이 이 세상의 종말에 있을 비유를 시돈에서 있었던 참화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마 11:21)의 동전에서 역시 이와 정확히 일치하는 유형의 배를 볼 수 있다. (Fig. 12) 이 동전들은 이백 오십년에서 삼백년 가량 후세의 것이지만 동전 속의 배들이 이백 오십년 전 즈음의 배를 담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동전은 몇 백년 전의 인물인 이순신 장군을 새겨넣고 있지 않은가?


 만일 페네키아의 전함 디자인이 외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면, 분명히 이집트보다는 크레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선체는 낮은 선수와 높은 선미, 비교적 곧은 외양 그리고 충각에 이르기까지, 크레타의 갤리선을 그린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그림에서도 같은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1200년 경에 있던 전투에서 활약한 배들은 돛에는 아래활대가 없이 스탠딩 활대만 있었다. 이들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노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층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 노가 어떻게 배열되어있었는가에 관한 의문을 잠시 미뤄둔다면, 훗날 바이림(bireme *역주 2층짜리 노선)이라 불리던 배의 매우 이른 형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부터 조금 골치 아픈 얘기를 시작해보자.

 그리스의 배에 관해 돌아오면, 우리는 과거 시기의 배들과 연관된 모든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렵고 흥미로운 것에 직면하게 된다.

 Q: 그리스와 로마의 갤리선들은 어떻게 노와 노잡이들을 배열하였는가?

 이에 관한 답을 간단히 말하라면 

 A: 연구하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

 최근의 발견들은 여러 연구자들의 의견에 좀더 많은 일치점을 갖게 해주었지만, 여전히 일치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노를 젓는 배로서 전투를 치루거나, 좋은 바람과 함께 긴 여행을 하던 수송용의 롱 쉽, 갤리선들만을 다룰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배들은 진짜 그리스인들이 이 땅에 이르기 전에, 그리스 본토에서 크레타 인들 혹은 그들의 가까운 친척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기원전 1300년 경 도기에서 발견된 Fig.34의 그림에서 초기 갤리선의 형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리스가 제해권을 장악해갈 때 그들은 길고 개방된 형태를 갖고 있었으며, 충각과 높은 선미, 노잡이들의 머리 위에서 끝과 끝으로 이어지는 공중 갑판의 종류를 갖춘 갤리선들을 사용하였다. Fig.33의 그림은 그런 갤리선의 일반적인 외형을 보여준다. (Fig.33과 34는 차후의 챕터에서 소개될 예정입니다.)

 Fig.13은 노 젓는 사람들이 어떻게 배열되었을지를 알려준다. 이 것들은 기원전 800~700년 경의 배들인데, 종종 상부 갑판에도 노 젓는 사람들이 보이곤 한다.


 거의 50인의 장정들이 노를 저어야 하는 갤리선들은 각 측면에 25명이 배치되었다. 이보다 더 많이 배치되는 것은 불가능한데, 배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지면 어떤 바다로 나가든 배가 두동강이 날 수 있는 까닭이다. 보다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같은 길이 안에 보다 많은 노잡이를 효과적으로 배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배열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가장 간단한 방법은 노를 길게 만들고, 그 노에 둘 이상의 노잡이를 배치하는 것이었다.  헌데, 이는 그리스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이다.

 다른 방법은 두 개의 층을 만들어 노잡이를 배치하는 것이다. 이 것은 초기 도자기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긴 하지만 배가 불안정해지고 위층의 노잡이들이 매우 긴 노를 저어야 하는 난점이 있다. 따라서 이 것 역시 제외된다.

 세 번째 방법은 같은 층의 층에 한 쌍의 노를 아주 가깝게 배치하되, 노가 선미에 가까울수록 노의 길이를 길게 만드는 방식이다. 같은 벤치에 옆으로 두 노잡이를 배치하면 되는데, 이는 서기 14~15세기의 지중해 갤리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것이 고대 그리스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라고 보는데, 사실 이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네 번째 방법은 기원전 700년 경의 페네키아의 전함이나 기원전 500년경의 그리스 갤리(Fig.14)선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윗 층의 노들이 배치된 간격 중간중간으로 그 아래 쪽에 노 구멍을 내는 것이었다. 이 경우 위층의 노가 아래 층 사람의 머리에 걸림이 없게 간격을 조정해주는 것만으로도 두 층의 노를 배열할 수 있게 된다. 아래층의 노잡이들은 위층 노잡이들의 다리와 배의 측면 사이에 자리 잡게 되는데,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위층의 노잡이들은 조금 더 긴 노를 젓게 된다.


 여기까지야 그럭저럭 좋았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바이림(biremes)이나 2단으로 노가 배열된 배들 뿐만이 아니다. 트라이림(triremes *역주 고대 그리스 로마의 3단 노 군선), 쿼드러림(quadriremes *역주 4단 노의 갤리선), 큉커림(quinqueremes * 5단 노의 갤리선)에 만약 역사 속의 기록을 믿는다면 40 뱅크짜리 노선까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앞서 살펴본 이 층 배열의 원리에 한 층을 더하는 것이 어렵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레고 블록을 쌓듯 하나만 얹어 끝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기원전 700년에 페니키아에서 사용되던 바이림(biremes)을 보았는데, 그 것은 아마도 동시대의 그리스로부터 소개된 것이기 쉽다. 투키디데스가 말하기로 코린트인(Corinthians)들이 기원전 700년에 새로운 유형의 배를 개발했고, 기원전 600년경에 이집트에서 트라이림(triremes)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들이라 하였다. 어떤 경우이건 기원전 500년 이전에 이 것들이 동지중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배들이었고, 그들은 이 배를 가지고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활약하였음이 확실하다.

(Corinthians *역주 코린트는 성경에서는 고린도로 언급되는 곳이며 그리스 중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코린트인들은 기원전 8세기말까지 지협을 확고히 장악하였고, 코르키라와 시라쿠사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서지중해 무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두 패권 국가의 다툼은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 승패를 결정짓게 되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의 트라이림(trireme)을 종이에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물론,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까지 재현해보려 노력해왔다. 어떤 시도들은 웃겼지만, 어떤 것들은 그럴싸하면서 가망이 없었다. 어떤 것들은 본래 트라이림이 갖췄어야 할 것에 제법 가깝게 표현되기도 했다. 여하튼 최근의 이런 시도들은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결론을 도출했는데: "노의 최상층은 배 양측으로부터 길고 곧게 덮여진 돌출된 '구조물'에 바싹 붙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위에서 두 번째 층은 배의 (구조물이 아닌) 실제 선체 측면의 상단 모서리에 바싹 붙어있었고, 맨 아래의 세 번째 층은 꽤나 낮은 측면에 있었을 것이라 보았다.

 중간층의 노잡이들은 가장 위층의 노잡이들보다 배의 측면에 약간 더 가깝게 앉아야 했다. 맨 위층과 중간층의 노들은, 이미 바이림의 노를 구성하는 방법에서 논의했던 네 번째 배열 방법. 즉, 윗층의 노들의 간격 사이에 아래층의 노를 교차로 배열하는 방식이다.

(최상층)   .     .     .      .     .     .     .     .  (구조물인 아우트리거를 사용)
(가운데층)   .     .      .     .     .     .     .     (배의 선체에 가장 가깝게 배치)
(최하층)   .     .     .      .     .     .     .     .

 맨 하단의 노잡이들은 맨 위 열의 노잡이들의 정확히 아래에 앉게 되는데, 위에서 설명한 구조물, ‘아우트리거(outrigger *역주 배의 바깥 측면으로 돌출되어 장치된 노 받침대)’는 그들의 노를 다른 것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길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아우트리거는 중세 시기에는 ‘apostis'로 불리기도 했었으며,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증기기관의 시대가 오기까지, 그러니까 크세륵세스(5세기 경의 페르시아의 왕)로부터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이천여년 간 지중해 배에서 발견되는 구조물이다.


 지금까지 보존되어온 그리스 미술품의 양은 많지만, 그 가운데 트라이림을 표현하려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실제 우리가 살필 수 있는 자료에서 짚어볼 수 있는 정확한 사실은 단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깨어진 도자기 조각이다. (Fig.15)이 것은 갤리선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25피트 가량의 부분만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은 이 조각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맨 윗줄의 노들은 매우 명확하게 보이며, 의심스러운 점이라고는 그 것들이 네 개의 얇은 가로 줄 중 맨 윗줄을 안으로 지나가는지, 밖으로 지나가는지 뿐이다. 어떤 경우에건 맨 위의 두 줄은 아우트리거 또는 apostis의 구조물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포인트는, 맨 윗줄의 노들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노들의 가장 하단에 있는 네 번째 가로 선 바로 위에서 세 번째 줄의 apostis의 위쪽 밴드(줄band) 위를 지나가는 지점이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세 번째 줄의 이어지는 지점은 가장 윗 줄의 노가 세 번째 줄의 노가 나오는 apostis의 윗 쪽 줄을 지나는 지점에 있다. - 가장 낮은 네 번째 가로 줄의 바로 위. 이 노들과 가운데 노의 첫 가로줄의 사이가 apostis 아래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물에 닿지 않는 다른 사선들은 apostis를 지지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맨 아래의 두 줄을 보강해주는 것이거나 선체를 강화하기 위한 선체의 겉판자일 것이다.


 Fig.16은 같은 도기의 다른 조각으로부터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에 노의 맨 윗줄은 분명히 apostis의 두 수평 목재의 사이로부터 나오고 있다. 맨 아랫줄은 다른 사례에서와 같은 방법이 보여지고 있지만, 가운데 줄의 노는 어디에 갔는지 찾기 어렵다. 아마도 조각이 닳았거나, 도기를 만든 예술가가 세세한 표현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무거운 충각은 Fig.16에 잘 표현되어 있고, 동전이나 다른 곳의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Fig.17에서 선미를 살펴봐도 apostis와 방향타용 노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갑판 위의 어떤 구축물들은 배의 일부가 아닌 항구의 접안 시설일 가능성이 있다. (즉, 이 그림은 배가 항구에 정박한 그림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일반적인 갤리는 트라이림으로 보이지는 않고, 같은 층에 두개로 한 짝을 이룬 노들을 갖춘 바이림으로 보이는데, 이 배의 노 배열 방법은 앞서 바이림의 노 배열 방법으로 언급한 세 번째 방법에 해당된다. 이런 종류의 바이림의 다른 사례는 지금은 파리의 루브르에 있는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조각상(*역주 사모트라케의 니케, 일명 승리의 여신상)의 받침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일명 승리의 여신상. 로도스 섬의 유다모스 왕이 시리아 지방에 위치하고 있던 안티오코스와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기념으로 제작된 조각이다.)


 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평면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증거의 한 조각이 되어준다. 두 아우트리거(=apostis)의 맨 앞쪽 끝이 명확하게 표현되어있고, 양 쪽의 각 면에서 우리는 노의 첫 짝을 위한 구멍들을 볼 수 있다. 이 것들은 같은 층으로 배열되어있지 않은데- 다음 구멍의 맨 앞 열은 그 구멍의 다음 끝과 거의 겹쳐지다시피 하고 있다 -, 하지만 그 것들은 서로 매우 근접해있어 두 노잡이가 같은 벤치의 양 옆으로 앉아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각 구멍에서 우리는 놋좆 핀(*배의 노를 꽂는데 사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C.Torr의 경우에는 ‘고대의 배들(Aincient Ships)’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가 아우트리거라 부르는 이 부분을 닻을 운반하는 닻걸이(Cathead)로 설명하였다. 그는 그 것들이 아우트리거의 맨 끝이라는 생각에 대해 “그 것들이 아우트리거라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라고 하였지만, 로몰라와 앤더슨은 "이 것은 아우트리거로 밖에 생각할 수 없으며, 그 것들이 닻걸이라는 증거가 없다."라고 말한다. 주요 참고서적의 말을 믿을 수 밖에, 로몰라와 앤더슨의 설명을 듣고 Fig.17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것은 아무래도 '아우트리거'로 보일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덧글

  • 2009/05/06 08:58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Qui-gon 2009/05/06 18:02 #

    네, 저도 제가 정리한 글이 도움이 될 수 있는 듯하여 기쁩니다. 이렇게 양해까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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