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터민 인터뷰 [기타]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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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도 제사 풍습은 남아있어… 6·25 전쟁은 승리한 전쟁으로 인식.

 
-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큰 명절은 설날, 추석이고, 그 외에 4대 국경일이 있습니다. 북녘 땅에서는 어떤 날들을 명절과 국경일로 세고 있는지 궁급합니다.
(이하 박) “북쪽에서는 남쪽과 마찬가지로 설날과 한가위가 대표적인 명절입니다. 몇 년 전부터는 음력설을 세고 있기도 합니다. 청명이라고 부르는 명절도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단오라고 해야 알아들을 겁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명절 외에 김정일, 김일성 생일이 가장 큰 국경일입니다. 그 외에 8월 15일 광복절과 7월 27일의 전승일이 있고, 9월 9일 노동당 창건일, 10월 10일 공화국 창건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광복절, 전승일, 노동당 창건일, 공화국 창건일은 5주년, 10주년처럼 주기적으로 큰 단위가 올 때에 크게 치르곤 합니다.”


- 죄송하지만, 7월 27일 전승일은 어떤 승리에 대한 기념일입니까?
 “휴전일입니다.”


- 그렇군요. 북녘에서는 명절과 공휴일을 지낼 때, 2~3일을 내리 쉬는 ‘연휴’라는 것도 존재하나요?
 “남한에서는 일요일이 있으면 그걸 이어서 쉬고 한다는데, 북한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만, 김일성 생일날에 80주년, 85주년의 경우 3~4일을 이어 쉬었습니다.”


- 북녘 땅에서는 명절을 보낼 때 일가친척이 한 집에 모이는 풍습이 남아있습니까? 또, 차례의 풍습이 아직 남아있습니까?
 “물론 모입니다. 그리고 가정풍습에 따라서는 제사 풍습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 조금 이외인데요. 북한 사회에서는 유물론에 입각해 그 것을 낡은 구습으로 치부하지는 않습니까?
“예, 그래서 명절 때에 차례를 지내는 것만으로 대신하거나, 사망한지 3년이 안된 사람들에 대한 제사만 지냅니다.”


- 북녘 땅의 식량난이 제법 오래 지속된 것으로 아는데요. 제수 음식을 준비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듯 싶습니다.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상차림의 종류가 많지 않고, 특별한 음식보다는 보통의 음식을 차립니다.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 등속은 한 개나 세 개로 갖춥니다. 살림이 좋은 집이라야 다섯 개를 갖추기도 합니다.”




- 남녘에서는 윷놀이나 세배 등이 명절의 대표적인 놀이나 풍속이라 하겠는데요, 북녘에서는 명절 때에 즐기는 풍속이나 놀이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썰매타기, 연놀이, 윷놀이, 팽이 놀이를 합니다. 남쪽 사람들처럼 저고리를 차려입거나 하진 않지만, 세배라는 풍속도 있습니다.”


- 명절이나 국경일을 대표하는 음식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함흥에서는 설에 떡국을 끓여먹곤 합니다. 그러나 명절이라고 해서 상차림이 딱히 특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평양의 노래방 요금은 450원에 달해

 
- 일반적으로 북한의 주민들이 즐기는 취미나 여가생활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또 인기 있는 취미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사람마다 다 다르니 딱히 집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공으로 가지고 하는 스포츠를 다 좋아했습니다. 특히, 8년 동안 탁구를 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이 취미 같은데 신경을 쓸 겨를이 많이 없습니다.”


- 독서 등의 취미도 보편적일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는 어떤 식으로 책을 접할 수 있는지, 어떤 책들이 인기 있는지 궁금합니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학교 도서관을 이용합니다. 자기가 소유한 소설책을 기부하면 도서 자격증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것이 있어야 일주일에 한번씩 교환하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에도 도서관이 있어 책을 빌려볼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탐정 소설을 좋아했는데, 셜록 홈즈나 아르쉔 뤼팡 같은 책들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 서양의 서적들도 번역되어 소개되어있나 보군요?
 “예, 그렇습니다.”


- 북녘에서는 영화나 음악을 보통 어떤 경로를 통해 접하게 됩니까? 외국 영화도 소개되곤 합니까?
 “지역마다 극장이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청년기를 지칭하는 듯 하다.)에 자주 갔습니다. 영화는 주로 북한 영화이지만, 러시아나 중국의 단편 영화도 소개되곤 합니다. (어떤 종류의 영화입니까?) 중국 영화의 경우에는 보통 무협영화나 항일 투쟁을 다룬 영화들입니다.
 녹화기가 있어, 비디오테이프를 보기도 합니다만, 예전에는 100세대 중에 1세대나 갖고 있는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테이프도 하나를 빌리는데 50원 가량 했고, 외국 영화를 보는데 주로 이용됩니다.
 TV의 경우 한국에서처럼 연속극은 없고, 채널이 하나입니다. 평양과 개성에는 만수대, 개성 방송이 더 있습니다. 인도 마술과 경음악단, 중국 영화, 인도 영화 등을 틀어주곤 합니다.”


- 비디오테이프 등을 대여해주는 곳이 있나 보지요?
 “아닙니다. 개인이 불법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경제가 전보다 조금은 올라가서 100세대 중의 1세대보다는 많은 세대가 녹화기를 갖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북한에도 노래방이 있거든요. 그게 평양과 나진에 있습니다. 나진은 중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생겼습니다. 평양의 경우에는 노래방의 요금이 450원입니다.”


- 450원이면 큰 돈일 것 같습니다.
 “북한 돈으로 450원이면 큰 돈입니다. 장사를 하거나 간부가 아니라면 출입하지 못한다고 봐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좋아하시는 영화와 배우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민족과 운명이라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아마도 많은 북한 사람들이 그 영화를 꼽을 겁니다. 북조선 영화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특히 홍영자 역을 연기했던 오미란의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이상. 박모 씨. 여성.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현재 중국에 체류 중.)
 박모 씨의 경우 연길에 체류 중이어서 한국 사회 적응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이를 강모 씨와의 인터뷰 내용으로 보충한다.

 

- 북쪽에서 내려오실 결심을 하게 된, 어떤 동기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이하 강) “글쎄요. 어떤 동기라는 것을 말하긴 힘듭니다.
 저는 모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었습니다. 나라 경제가 많이 어려워지며 정부에서 대학에 대한 지원이 거의 끊기다 시피 되었고, 2002년 7월의 경제개선 관리조치 후에는 대학에 장사 등을 허용하고 자체적으로 자족할 수 있도록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본래 기숙사에서는 식사가 지급되었는데, 이 것도 나중에는 형편없이 바뀌었고, 껍질도 제대로 까지 않은 옥수수와 안남미를 섞어 양을 부풀리고 제공하곤 하였습니다. 그 것은 먹기가 힘이 들지만, 저의 경우에는 평양에 있는 대학이어서 그렇게나마 식사를 받을 수 있었지요. 지방의 대학들은 더욱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장사를 해야 했는데, 저희 집이 ⓞⓞ에 있었습니다. ⓞⓞ은 외국의 배가 드나드는 곳이어서 다른 지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좀 개방되어 있었지요. 그 곳에서 가전제품 등을 갖고 올라가 팔아야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이 평양에 있는 대학이다 보니 집안 형편이 좋은 친구들이 많았는데, 제가 갖고 올라온 물건들을 사주곤 했습니다. 사실 그들에게 그 물건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저를 돕기 위해 사주곤 했던 겁니다.
 대학에서 이런저런 일을 해야하다보니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고, 중국에 사는 부유한 친척들이 차라리 중국 쪽에 와 공부를 하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국으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 한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힘든 것은 고독함과 걱정

 
- 실례지만, 가족 분들께서도 함께 내려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그의 밝던 얼굴에 살며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혼자 내려왔습니다. 이북에 형제들이 남아있습니다.”


- 이 곳으로 내려와 실망하신 것은 없으셨습니까?
 “제 개인적인 경우에는 이 곳 사회에 대해 실망한 일이 없었습니다. 자유라는 것만을 바라보고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분명히 이 곳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 생활하시기에 불편하신 점도 많으실 것 같은데요.
 “예, 처음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일조차도 어색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있는 것이 무척 고독하고 힘이 듭니다. 집에 홀로 있을 때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가족들을 두고 홀로 내려온 사람들은 그런 고독감과 이북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새터민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은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입니다. 취업난이 극심한 지금에 새터민들에게는 취업의 벽이 더욱 높습니다. 그 때문에 극소수만이 안정된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 대부분이 식당 일등의 비정규직이나 일용직을 하고 있습니다.”


- 새터민에 대한 편견도 적응하는데 큰 장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담들을 자주 얘기 나누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사장이 ‘파일 바인더를 가지고 오라.’라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파일 바인더’라는 외래어가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파일 바인더’가 뭐냐고 속 시원히 물으면 좋은데, 그러질 못하고 우물쭈물 거렸답니다. 새터민들은 대부분 북한을 빠져나온 뒤에 중국 등지에 머물면서 한국에 내려온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전의 그 친구(처음에 함께 오셨던 동행 분은 약속이 있으셔서 바로 자리를 떠나셨음.)만해도 중국에서 9년 정도를 머물다가 한국으로 들어왔지요. 중국 등지에서는 국적이 불분명하고 신분이 노출되면 위험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숨기려는 경향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그 때문에 질문을 하고 주목받는 것을 꺼렸던 겁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자 그 사장이 욕을 퍼부었는데, 그 사람이 해명을 하니 ‘이제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대든다.’라 하더랍니다. 이런 일들은 힘들게 취업에 성공한 일부 새터민들이 직장 유지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 하나원에 계셨다고 하셨는데, 하나원에서는 보통 어떤 교육을 받게 됩니까?
 “하나원에서는 탈북자에 대한 지원 법령과 외래어에 관한 교육, 물건을 사는 연습 등을 합니다. 사실상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전까지 대기하는 곳의 성격이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수공예 기술 등, 사회에 나가 소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술들을 교육시키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운전면허증 등도 배려를 해주었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 근래의 정부가 햇볕정책 등의 대북 포용정책을 시행하면서, 황장엽 씨 등과 같은 탈북자들의 발언과 활동을 통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부분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보여 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부의 태도나 탈북자 지원 정책에 대해 새터민들의 불만도 많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정부의 정책이나 태도에 대해 저희가 어떤 불만을 가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생산적이지가 않지요. 새터민들은 자신들이 의견을 모아 전달하려 노력합니다. 얼마 전, 통일부에서 이런 모임을 주최한 적이 있었습니다. 새터민들의 의견을 다양하게 청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북쪽에 가족이 있기 때문에 햇볕 정책에 대해 일정부분 고마운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햇볕 정책이 실제 북한의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부분은 그리 직접적이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고 봐야 합니다. 지원된 물품들에 대해 직접 혜택을 받기도 어렵고, 그렇게 유입된 것은 시장에서 ‘살 기회’가 주어질 뿐인 것입니다.
 정부의 햇볕정책도 중요하겠지만, 탈북자 지원책을 정비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BBC 방송에서는 탈북자가 30만명에 이를 경우, 북한 정권이 붕괴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탈북 러쉬를 가속시킬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새터민들입니다. 새터민들은 북쪽의 가족들과 연락을 하곤 합니다. 그런 것을 하는 브로커들이 있어요. 그런데, 많은 새터민들이 이 곳에 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탈북을 하는 것을 만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이 탈북자를 정치적 난민으로 수용하게 되었는데, 최근 설문조사 결과 70~80%에 이르는 새터민들이 만일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어찌되었건 같은 언어를 가진 동양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적응하기에 더욱 쉬울 것이라 여깁니다만, 대체적인 새터민들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새터민의 적응 문제를 비단 정부의 지원 부족만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새터민들의 적응 노력이 부족한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성 교제에 대한 문화 차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탈북자 지원 정책의 변화와 개인적인 사항들에 대해 질답을 이어나갔다. 우연히도 그와 나는 같은 본관의 성씨였는데, 북한의 경우 계파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가까운 항렬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그의 집을 찾았다. 집에서는 좀더 가볍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 인상도 밝고 얼굴도 좋으신데, 혹시 여자친구는 있으십니까?
 “남쪽에는 여자친구라는 말이 모호하지요. 결혼을 약속하고 사귀는 사람에 대한 말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북쪽에서는 여성을 사귈 때 결혼을 전제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쪽에서는 그렇지가 않아 좀 혼란스럽습니다. 하나원에 있을 때에 이성 교제의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만, 북쪽 사람끼리 결합하면, 둘 다 사회를 몰라 살기에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남쪽 사람과도 문화적 차이 때문에 사귀거나 결합하기가 힘이 든 것 같습니다.”


- TV는 즐겨보세요?
 “즐겨보는 편은 아닙니다. 예전에 드라마 중에 ‘러브 인 하버드’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거기에 나온 김태희라는 여배우가 예뻤지요.”




- 저도 개인적으로 김태희를 좋아합니다. 북한에서도 인기 있는 여배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예, 오미란이라는 여배우가 인기가 좋았습니다. 몇 개월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강모 씨. 강원도 xx 출신. 현재 서울 거주.)


덧글

  • 박혜연 2008/09/28 00:34 # 삭제 답글

    오미란씨는 홍영희, 김정화씨와 더불어 북한최고의 여배우셨습니다! 원래는 만수대예술단소속 무용배우였는데 김정일에 의해 1980년 영화배우로 전업한거죠! 26년간을 백여편의 영화에 출연해 인민배우로 활동하시다가 2006년 유방암으로 52세에 타계하셨죠! ㅠㅠ 참 미인이셨는데...
  • Qui-gon 2008/09/28 20:18 # 답글

    저도 북한학 수업 중이나 만나뵙게 된 분께 얘기로만 들은 거라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는 알지 못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박혜연님.
  • :) 2012/04/13 01:11 # 삭제 답글

    감사합니다. 고등학생인데 동아리 활동자료로 참고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박혜연 2014/03/02 22:35 # 삭제 답글

    특히 민족과 운명의 홍영자역으로 나오셨을때 제일 기억이 남더군요? 가공인물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적절한 여자관계를 목격했던 장본인이니...!
  • sy 2014/08/15 21:25 # 삭제 답글

    학교 과제에 참고하겠습니다! 좋은 정보 많이 알아갑니다~
  • dd 2015/08/19 18:38 # 삭제 답글

    고등학교 통일관련 동아리입니다. 축제 전시물 제작시에 참고하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dd 2015/08/19 18:38 # 삭제 답글

    고등학교 통일관련 동아리입니다. 축제 전시물 제작시에 참고하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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