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의 형성 [기타] 기타

 주체사상은 흑묘백묘로 대변되는 등소평의 실용주의, 후진타오의 조화사상 등과 같은 일종의 통치이데올로기로 조선인민민주공화국 헌법에도 명시되어있다.


 건국 당시의 통치 이념은 맑스-레닌 주의였는데, 북한에서는 체제 유지를 위해 주체사상이 1930년 동만주 카륜에서의 회의에서 김일성이 첫 발안을 하였다고 했지만, 황장엽 회고록에서 보듯 그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려우며,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것을 주체사상의 시원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싶다. 이러한 주체사상은 1980년대에 김정일에 의해 김일성주의로 재해석된다.


 주체사상은 황장엽, 양형섭 등의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정리되었는데, 황장엽과 양형섭 간에는 이론적 대결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론적 대결의 논쟁사안은 사회주의 완성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한가에 관한 문제였는데, 양형섭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보았던데 반해, 황장엽은 계급이기주의가 지도자의 이기주의로 이어져 개인숭배와 독재로 집약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완성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계급사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무게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 대결에서 황장엽은 일시적으로 숙청당했지만, 후에 복권되어 주체사상 정리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주체사상은 다섯 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55년에서 61년에 이르는 권력주체의 단계이다.


 55년 12월 27일, 「사상사회에서 교조주의와 사대주의를 극복하고 주체를 세우는데 대하여」라는 주제로 연설이 있었는데, 1930년 동만주 카륜을 시원으로 보는 북한의 견해와는 달리, 이 때를 주체 사상의 시원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이러한 발언의 저의는 58년까지 북한에 주둔했던 중공군을 의식하고, 연안파와 소련파 등에 대한 견제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61년에서 70년까지는 자주노선의 시기로, 중국과 소련의 분쟁이 첨예화되던 때였는데, 이 때에는 소련의 기술적 원조와 중국의 정신적 동조가 중요한 시기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균형 유지를 위해 자주노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주체사상을 활용하였고, 자유, 자립, 자주, 자율이 중시되었다.


 70년대는 동원화 시기로 황장엽의 인간중심사상이 중요하게 부각되었으나 정작 주민에게는 별다른 권리가 주어지지 않아 이론으로서 현실에 적용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 시기에 6차 당대회를 통해 김정일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80년~94년까지는 권위의 정당화 시기인데, 권력의 이양과정에서 수령절대주의가 완성되었고 혁명적 수령론으로 탈바꿈되어 수령은 뇌수, 인민은 팔과 다리에 비유되었다. 평양을 방문하고 주체사상을 학습했던 김용환이 “주체사상은 없고, 김일성․김정일 주의만 있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시기는 정확히는 김일성 주석 사망 전까지로 주체사상은 수령의 신격화에 이용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96년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충효사상 시기로, 신격화된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하기 위해 충효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유물론 등에 입각하여 과거로부터 탈피하고 유교 사상 등의 구습을 배척하며 체제를 확립해온 과정에서 이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변화와 개혁 원동력을 저하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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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고자료는 '10명의 북한 출신 엘리트들이 보는 10년후의 북한' 및 '황장엽 회고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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