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의 역사] 이집트와 크레테 下

범선의 역사 이집트와 크레테 (下) written by qui-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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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글에서 우리는 이집트의 배들에 대해 살펴봤다. 이번 글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집트의 배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기원전 1,500년 경에는 하트솁수트 여왕이 나타난다. 예나지금이나 그렇지만 여성 통치자는 좀 이채롭다. 이 여왕은 자신이 여성임을 과시하듯, 푼트로 알려진 먼 나라로부터 몰약을 얻어오길 원했다. 몰약은 향료 혹은 약재로 사용하는 향기 있는 수지를 말한다. 푼트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늘날 추측하기로 소말리아나 좀더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동부 해안으로 짐작하고 있다. 거기가 어디든 간에, 그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홍해를 지나야 했다. 여왕은 다섯 척의 배를 보냈다.

 혹시나해서 외국 검색 사이트에서 하트솁수트 여왕에 관한 이미지를 찾아봤다.

 갑작스런 납량특집. 미이라이긴 하지만, 이렇게 봐도 제법 미인이었을 것 같다.
 그다지 신빙성 없는 3D 그래픽은 다소 노출이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해서 수록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 무렵에 나일에서 홍해로 연결되는 운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근세에 건설된 수에즈 운하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푼트로 가는 것은 나일에서 지중해를 건너는 것만큼 쉬웠다고 하는데, 정말로 쉬웠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난이도는 비슷했던 것 같다.

 그 원정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여왕은 매우 기뻐하였고, 그 원정의 결과를 테베 부근의 다이르알바리 사원(Deir-el-Bahari)의 벽에 모든 이야기를 새겨두었다. 다이르알바리는 왕의 계곡 동쪽 나일 강 서쪽 강둑 위에 위치한 사원으로 세 개의 건축물이 있으며, 그 가운데 두 번째 건축물이 절벽에 기대어 세워진 하트솁수트 여왕의 건축물로써 지리적 입지를 창의성 있게 건축학적으로 활용한 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새겨진 두개의 조각들은, 각각 다섯 척의 배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늘날에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목적지에 도착한 함대를, 다른 하나는 이집트에서 출발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배들은 모두 같은 형태이지만, 상태는 서로 다르다. 우리는 돛으로 항해하면서 동시에 노를 젓는 것을 다음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화물을 싣기 위해 해변에 접근할 때는 돛을 내리고 노를 젓는데, 그 도기의 두 번째 배는 노를 저어 물길에 역행하고 있다.

 대략적으로 살펴보자면, 하트솁수트 여왕이 보낸 배들과 그보다 1500년에 앞서 사후레 왕이 보냈던 배들 간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1500년 동안 큰 발전이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선체의 모양은 많이 유사하며, 밧줄 트러스로 선체를 강화시킨 것도 동일하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결정적인 변화들 가운데 하나는 이중 구조의 돛대를 대신해 하나의 원재로 이뤄진 돛대(spar)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돛대에는 두개의 지삭(支索 *주 : 돛대를 고정시키는 굵은 밧줄)과 후지삭(後支索)이 있으며, 두개의 용층줄(halliards *주 : 돛대의 돛을 오르내리게 하는 줄)이 선미를 향해 뻗어 있다. 거기에 어떤 흔적이나 표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A 형태의 돛에 비해 이러한 일반적인 돛의 형태는 돛대 밧줄을 보다 필요로 했을 것이다. 돛대를 배에 매우 단단히 고정시켰기 때문에 돛을 자주 내리는 일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활대와 아래활대(boom)는 모두 두 조각의 나무를 묶어 결합시킨 형태로, 아직까지도 지중해와 홍해의 배들에는 그러한 방식이 남아 있다. 돛대의 끝에서 활대로 여덟 개의 밧줄이 이어진다. 활대를 올릴 때에는 그 중에 단 두 개의 밧줄만이 팽팽하게 유지되며, 나머지 밧줄들은 느슨히 풀어놓는다. 활대를 내릴 때에는 모든 밧줄이 팽팽해진다. 최소한 열여섯 개의 밧줄이 돛대 끝으로부터 아래 활대로 이어진다. 이 모든 밧줄의 용도를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밧줄들 가운데 두 개는 활대의 수평을 유지하거나 기울이기 위한 밧줄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아딧줄(brace)들은 활대에 두 개, 그리고 아래활대에 두 개가 있다; 아래의 것들은 중앙에 가깝게 묶여있는데, 그들은 이 아딧줄들을 활대를 틀기 위해서 사용하기보다는, 아래활대가 내려가지 않도록 유지해주는 용도로서 사용하였을 듯싶다. - 물론, 이런 복잡한 것들이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조타장치(steering-gear)는 대단히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 이상 길다란 노를 사용하지 않고, 진정한 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타장치는 키잡이(helmsman)의 손에 쥐어져 어느 방향으로든 밀어내는 것이 가능했는데, 키가 고정되어 있어, 그 것이 틀어지는 것은 오직 키가 걸려있는 구멍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그 것은 키 손잡이 혹은 돌출한 손잡이가 있었다. 이러한 키들은 양 옆에 하나씩 두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키는 양 옆 혹은 뒤쪽에 설치하는 것이 앞에 설치하는 것보다 더 낫다.

 선체에는 노를 젓는 사람들의 아래로 타원형의 노가 있으며, 얼핏 보기에 포문이나 두 번째 노를 내놓기 위한 구멍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갑판을 보강하고, 배의 옆면을 함께 고정시켜주는 갑판보(beam)이다. 이물(bow)은 사후레의 배와 매우 유사하지만, 선미에는 연꽃 문양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 배의 크기는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만약 그들이 1:14의 비율로 그린 것이라면 (2 digit = 1 cubit), 이집트 인들의 큐빗(척)이 28 digit이므로, 아마도 88피트의 길이에, 노의 길이는 3.5 피트 가량이 될 것이다. 참고로, 1피트는 30.5cm이다.

 다이르알바리의 도기에 있는 다른 그림은 배에 두 개의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싣고 나일 강을 내려가는 커다란 배를 보여주고 있다. 하트솁수트 여왕이 세운 두 오벨리스크는 런던 템즈 강 제방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보다 큰 것이다. 그 오벨리스크들은 100피트 가량의 높이에 무게가 각각 350톤가량 되었다. 비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좀더 작은 두 개의 오벨리스크를 옮기는데 사용된 배가 207피트의 길이에 69피트의 너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번째 오벨리스크의 수송과 관련된 비문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보다 큰 선박이 건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적당한 증거가 있다.

 “…… 거대한 배를 건조하기 위해 온 땅의 나무들을 …… 엘레판티네에서 두개의 오벨리스크를 싣기 위해……”

 선체의 각 끝 부분에 배 밖으로 나오는 부분에 대한 별다른 지지물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두 오벨리스크의 끝과 끝을 고려할 때 200피트 이상의 길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그림이 몇몇 사람의 크기를 제외하고 비율에 맞춰져 그려진 것이라고 본다면 배의 길이는 최소한 300피트일 것이며, 대략 330피트 가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는 푼트에서 보내졌던 동일한 형태의 배들을 통해 생각해본 것인데, 아마도 그 배는 세 열의 갑판 보(beam)를 갖고 있었을 것 같다. 이 갑판보들은 오벨리스크들을 눕힌 갑판과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갑판보의 위치가 갑판과 연결되어있지 않고 보다 낮은 경우에는 무게를 지탱하도록 돕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보트를 들고 이동하는 해병대에게 키가 작고 손이 짧은 대원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최소한 삼십 개의 노를 젓는 배들이 강 아래로 오벨리스크를 수송하였다.

 이 배가 가장 거대한 목재 범선보다 크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은 사실 별 가치도 없다. 정말 궁금한 것은 증기나 유압기관, 도르래, 와이어도 없이 어떻게 오벨리스크를 실었는가 하는 점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을 런던으로 옮겨올 때는 철제 회전기가 설치되어, 오벨리스크를 안쪽으로 밀어 넣는데 사용되었다. 갑판실이 추가되었고, 영국으로 옮겨질 때에는 증기기관이 사용되었다. 이런 기술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집트인들의 방법은 이처럼 재치 있는 방법은 아니었어도, 분명 대단히 효율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트솁수트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이집트 주변의 다른 국가들이 동지중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아직 그들의 이름값을 못하던 때였지만, 그리스, 특히 크레테 인들의 경우 기원전 2천년 경에 이미 높은 수준의 문명에 도달해 있었다. 이들은 이집트의 배들과는 대단히 다른 패턴의 배를 보유했는데, 불행하게도 크레테는 이집트의 꼬꼬마 예술가들조차도 갖추지 못해 그림으로 전하는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노를 젓는 배인 ‘롱 쉽’과 돛을 중심적으로 사용하여 항해하는 ‘라운드 쉽’의 두 유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이는 이집트의 배들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크레테인들이 발전시킨 이 것이 그리스와 로마의 배들을 거쳐 목재 선박의 말기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었다.

 롱 쉽은 좋은 전나무의 목재를 선체의 선을 따라 이집트의 배들보다 곧게 배열하였고, 뱃머리가 조금 높이 올라간데 반해, 이 배의 선미는 갑작스럽게 위로 뻗어 보다 높이 올라가 있었다. 이 배는 제법 많은 수의 고정된 노를 저으며, 방향을 조정하기 위해 측면의 방향키들(side-rudder)과 큰 방향타용 노(big steering oars)들을 사용했다. 돛대와 돛은 보이지 않는다. 바이킹의 배를 떠올리면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 ‘충각’(Ram bow)에 있다. 사실 이 충각은 이후 지중해의 롱 쉽이나 갤리선에서 변함없이 나타난다. 충각이란, 상대 배의 측면을 정면을 들이받아 구멍을 낼 수 있도록 하는 돌출된 부분을 말한다. 참고로, 벤허가 로마 전함에서 죽을 뻔했던 것도 마케도니아 전함의 충각 탓이었다. 벤허 중에는 집정관이 심술을 부려 빠르게 노를 젓는 장면이 있는데, 평상시 속도에서 전투 속도(battle speed)를 거쳐 '램 스피드'(Ram speed)라는 매우 빠른 간격의 노젓기가 나온다. 이 때의 램 스피드란 충각으로 상대 배에 충돌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동할 때의 속도를 의미한다.

 라운드 쉽의 경우에는 항상 돛이 있고 거의 대부분 고정된 노(oar)가 없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과 선체의 전체적인 형태는 그 시대의 이집트 배들과 보다 유사했다.

 그리스 일대에까지 미치던 이집트 왕의 권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크레테는 곧 고대 그리스의 선조들에 의해 통치 받게 되었고,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히타이트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쫓겨난 크레테 인들은 이집트인들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남쪽에 정착하여, 성경에서 블레셋(Philistine)으로 언급되는 지역을 건설하고 통치하였다.
 기원전 1200년경, 이들 “북쪽 사람들”로부터 승리를 거둔 이가 람세스 3세였다. 이 이집트의 마지막 위대한 통치자의 승리를 기리는 조각에는 대단히 다른 형태의 배들로 구성된 두 개의 함대가 등장한다.

 람세스 3세는 뭔가 좀 간지나게 생겼다. 사후레 왕을 제외한 이집트 왕족들은 한 외모 했던 듯.
 이집트의 배들은 전과 같은 형태를 갖고 있지만, 거의 모든 세밀한 부분에서 변화를 보여주었다. 선미의 연꽃 장식이 사라졌고, 끝은 가늘고 위로 젖혀져 있다. 선수(bow)는 실제 선체를 이루는 구조의 끝으로 이뤄져있고, 사자 머리로 장식되어 있다. 노 젓는 이들은 현장(bulwark *주: 파도를 막기 위한 뱃전의 장벽)으로 보호받고 있고, 돛대에는 ‘꼭대기’(top)가 있다. 어쩌면 이 두 가지 특징들은 아마도 전함에서만 발견되는 것일지 모른다. 돛의 경우에는 아래 활대가 없어지고, 돛이 위 활대에 걸쳐 올라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북쪽 사람들’로 표현된 크레테 인들의 배는 외관상으로는 순수한 범선처럼 보인다. 선수와 선미는 서로 닮았고, 이집트의 배와 비교가 될만한 곧은 선체를 갖고 있다. 또한 배의 양 끝은 급격하게 위로 휘어 올라가 새머리 장식으로 마무리되어있다. 그들의 돛대와 돛은 이집트의 배들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이집트의 꼬꼬마 미술가들이 자기네 익숙한 대로 그림을 그리다보니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 이를테면 배에 관한 작은 차이들을 그냥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쨋건 이 전투는 이집트 제국이 거둔 마지막 성공 중의 하나였다. 물론, 이집트는 그 후에도 몇 세기 동안 누구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국으로 지내왔지만, 세계를 상대로 휘두르던 막강한 권력이 서산하늘의 해처럼 기울고 만 것이다. 블레셋 인들과 헤브루 인(Heberews)들, 아람 인(Aramæans)들이 이집트로부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빼앗아갔다.
 선원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이집트인들을 대신해 동부 지중해(the Levant)의 무역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국가, 페니키아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집트는 세계의 문명화를 선도하였고, 결과적으로 조선과 항해의 초기 단계에서 많은 것을 이루긴 했지만, 당시 수준에 만족하고 정체하여 결국 조선술의 새로운 발전은 다른 국가에게로 넘겨지고 말았다. 이는 이시기에 이미 크레타인 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고, 보다 시간이 흘러서는 페니키아인들이나 크레테의 성공적인 계승자인 그리스, 로마에 의해 이뤄지게 되었다. 이집트의 영화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뭍혀가고 있었다.

 8장 분량을 틈틈히 번역하고, 이런저런 책과 인터넷에서 자료를 모으며 작성한 것이 이 첫번째 챕터였다. 사실, 방학 중에 시간이 많아져 질질 끌던 것을 금새 마무리했지만, 어쨋건 그렇게 오랜시간에 걸쳐 작성한 것이 겨우 두 편에 걸친 분량이라는 것이 조금 허망하긴 하다. 이 것으로 이집트와 크레테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락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주 참고 서적의 순서에 따라 기원전 1000년부터 서기 400년에 이르는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의 배에 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by Qui-gon | 2006/07/23 08:27 | [번역] 범선의 역사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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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ㅋㅋㅋ at 2006/07/27 00:37
가끔와서 보는데 이게 콰이곤횽아 블로그였구나

앞으로도 계속 부탁해 횽아~
Commented by 멋지네요... at 2007/01/04 23:39
Commented by 냥이 at 2009/11/02 20:19
아마 하마셉수트왕과 사후레왕이 보낸 선박과는 별 차이가 없었을 껍니다. 두 왕시절에도 아카시아나무를 썼으니...
Commented by Qui-gon at 2009/11/14 20:22
아, 재질에서 역시 차이가 거의 없었나보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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