降臨 #5: 아마겟돈 Z - 적 그리스도의 지옥 공청회 中.

#5: 아마겟돈 Z - 적 그리스도의 지옥 공청회 中.

 처음에는 계획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요.

 "그랬죠. 그 무렵 저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습니다. 학교에 진학했지만 아직 이렇다할 추종자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계획이 틀어진 거죠. 학교의 급우들은 저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듯 했는데 실은 알게 모르게 벽을 둘러치고 있었습니다. 순수한 아이들의 영혼이 부정한 제 존재를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더군요. 아버님이나 다른 군주님들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런 경우라면 제 일이 무척 어려워질 테니까요.

 다행히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만, 문제는 여전히 있었어요. 전 창녀의 자식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처럼 예쁜 옷이나 좋은 학용품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라벨만 붙지 않았을 뿐, '난 하위 5%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할 추레한 옷을 입고 다녔죠. 그게 바로 사단이었어요.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신조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빈한한 저를 따돌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건 우리가 설파한 천박한 자본주의의 단면이었고요!

 특히 여기에는 그들의 부모가 크게 한 몫을 했는데, 아마도 그들은 등하교 길에 아이와 손을 잡고 걸으며 이렇게 말했겠죠. '아까 그 애 이름이 뭐니? 그 헐렁한 옷을 입은 애 말이야. 민규? 그 애 이름이 민규였구나. 앞으로 민규랑은 놀지 마라. 왜 그러냐고? 아무튼 민규랑은 놀지마!'하는 따위의 가정교육 말예요.
 제가 그 사실을 안 것은 짝꿍으로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민지가 어느 날 갑자기 냉랭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상황 파악을 위해 집요하게 물으니 민지는 "우리 엄마가 너같이 더러운 애랑 놀지 말랬어."라 말하더라고요. 뭐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눈에서 눈물이 핑 돌대요. 정말 당황스웠지요. 당시에는 인간의 몸을 빌리고 있어 가끔 그네들의 감성을 느낄 때가 있었거든요. 부신피질과 호르몬 말예요. 아무튼 제 생각엔 군주님들께서도 인간 부모들의 저런 교육법에서 우리의 새로운 악덕을 연구하고 개발하실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몇몇 청중들은 인간들에게 비교되자 불만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당시로 접근이 가능한 아이들도 있었을 텐데요?

 "아무튼, 당시로서 제가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아이들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런 녀석들은 사심이 없고 순진해 우리의 술책이 파고들 여지가 없었죠. 그들을 이용하자면 악마의 술책이 아닌 인간의 간교함이 필요했는데 제 조건은 그런 면에서 어중간했습니다. 이쪽도 반이고 저쪽도 반이고. 전 우리의 적이 2천년 전에 왜 그리 고민이 많았고 방황도 많이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죠.

(청중들의 웅성거림.)


 학교에서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중간고사였어요. 중간고사에서 전환점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죠. 뛰어난 학업 성적이라면 이기적인 아이들의 벽을 허물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드라마를 통해 얻은 세상의 진리였는데....... 음, 저쪽 세상은 원래 그래요. 가난한 자는 학업을 성취해 부유한 자들과 교류할 수 있고, 그들의 중간 관리인으로서 반쯤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죠."


 그렇게 되면 중간에 많은 시간이 공백으로 남지 않습니까? 당신은 언제 어디서 강도 높은 경쟁에 노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말씀하신대로 그 순간에도 제 경쟁자는 옛 제자들을 찾아내며 세력을 모으고 있을 공산이 컸죠. 저도 바지런히 움직이며 그들의 계획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저쪽에는 '궁핍은 발전을 낳는다. 필요한 것의 부재로 인한 간절한 욕구가 창의적 사고의 밑바탕이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제 상황이 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발상의 전환을 하려 노력했어요. 인간의 작은 전두엽을 갖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문득 그 계획이 떠올랐지 뭡니까! 주말마다 교회로 나가 신앙 생활을 하고 필요한 추종자를 양성하겠다는 그 계획 말이지요. 지금 생각해도 참 기막힌 계획이 아닙니까!"

(비명과 함께 소란이 일었다. 살가죽이 찢기는 소리와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군주들의 공포어린 목소리에도 소란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교회에 들어가셨다고요? 그 여파는 생각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당면할 수 있는 위험이라던가.

"흠, 뭐 인간들은 저 같은 존재가 성소를 찾는 일을 두고 신성모독이라거나 신성을 범하는 거라 비난을 하겠지만, 그건 우리들을 몰라서 하는 소리죠. 우린 존재 자체로 신성모독이고 신성을 범하는 데 존재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의 존재에 대해 죄를 물을 수는 없죠. 그렇게 죄를 물으려던 인간들은 지금 지옥에 와있어요. 그건 그런 행동이 잘못된 일이라는 의미죠. 히틀러나 밀로셰비치 같은 사람들 말이에요. 심지어 신조차도 원죄를 두고 인간의 존재 자체를 죄악으로 규정한 건 아니잖습니까? 존재와 동시에 주어진 하나의 짐인 것이죠. 만약 존재를 죄라고 여겼다면 그 영감이 대홍수가 있기 전에 굳이 노아를 방문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뭐 제가 특별히 다른 죄를 저지른 것이냐? 그것 역시 아니었죠!

 우리들이 교회 같은 장소에 발을 들이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운 건 사실입니다. 모두가 그 일을 병적으로 겁내니까요. 헌데 아이러니한 건 실제로 성소에 발을 들이는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물리적 위해를 끼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더 아이러니한 건 우리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고요.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간 목회자들은 '이 곳은 주님의 거처입니다.'라 말합디다만. 이치를 따져보자고요. 세상 어딘들 신의 거처가 아니겠어요! 심지어 이 지옥마저도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망할 본성이 문제죠. 규칙이라면 거짓 논리에까지도 굴종적인, 우리 지옥 형제들이 가진 더러운 노예 본성 말입니다. 악마가 성소를 침범할 수 없으리라는 인간들의 믿음 덕에 이미 우리의 생각이 병들었는데, 20세기 이후의 영화 산업 발전이 우리의 엉뚱한 상상력을 부채질 했어요. 성소에 대한 집단적 공포가 유발되던 시대를 생각해봐요. 그렇게 강화된 믿음이 플라시보 효과를 일으켜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빚기도 했잖아요.

 지금은 다시 그리 못하겠지만 다행히 당시의 저는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난 상황이었죠. 저는 이 거짓 논리의 허와 실을 바탕으로 기적에 가까운. -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기적'이란 건 천박한 표현이지만 지금 이것보다 적합한 어휘가 없네요. 흠, 기적에 가까운 사고 전환이 가능했어요. 고정의식을 타파한 거죠. 물론 무의식 속에 플라시보 효과를 일으킬 잔재 공포가 있을까 두려워, 교회로 들어설 때마다 '이건 그저 건물일 뿐이야. 이건 그저 건물일 뿐이야.'하고 속으로 되뇌곤 했어요.

 아무튼 초창기 저의 교회 공략은 참신한 사고와 과단성, 정교한 사고 전환이 빚어낸 놀라운 업적이었다는 걸 기록해두셔야 할 겁니다."

by Qui-gon | 2008/07/08 14:46 | [소설] 降臨 | 트랙백 | 덧글(4)

降臨 #4: 혁명가와 혼혈아

#4: 혁명가와 혼혈아. ((퇴고일: 2008. 7.7))

 베드로의 현신은 학교 건물 뒤쪽 으슥한 자리에서, 점심도 먹지 못한 채 네 명의 친구들에게 신나게 얻어맞는 중이었다. 베드로는 중산층 가정의 유복한 아이로 구김살 없이 순진하게 자라났고 교우 관계도 원만했으며 성적도 괜찮은 아이였다.
그런 베드로가 친구들에게 맞는 이유를 말하자면 원만하다는 말의 뉘앙스를 살펴야 한다. 세상사람 모두가 알듯이 만약 담임교사가 성적표의 활동 발달란에 '이 학생은 교우 관계가 원만하다'라는 말을 적어놓는다면 그것은 교사가 인지할 수 있는 영역에 한정된 관찰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완벽히 좋은 교우관계가 아닌, '예외는 있으나 대체로 좋은 것'을 의미하는 셈인데 베드로에게는 이 네 학우가 바로 예외에 해당했던 것이다.

 "야, 이 찐따 새끼야. 얼마 안 되는 돈 하나 제대로 못 맞춰?"

 네 친구와 베드로의 관계는 여러 예외적 관계 유형 중에도 일종의 조공 관계에 해당했다. 조공 물목을 맞추지 못하면 으레 벌어지는 상국의 행패. 베드로는 사대 관계에 익숙했던 선조의 아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도 있었다. 또한, 이 다섯 아이가 C.A로 역사연구반 활동을 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으로 네 아이는 특정한 경제적 이론의 신봉자이자 역동적인 혁명가일 소지가 있다. 소득이전을 통한 부의 재분배로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은, 부자의 1원과 빈자의 1원의 가치를 달리 보는 것으로써 가능하다. 민주사회의 문명화된 정부는 이런저런 합의를 도출하느라 이런 쟁점을 해결하는데 지지부진하지만, 초등학교의 세렝게티라면 사정이 다르다. 네 마리의 하이에나는 사자 한 마리가 먹을 양으로 함께 만족할 만치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만일 기성 질서가 조속히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다면 이 신세대 사상가들은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각기 다른 색- 정확히는 백색, 적색, 검정색, 청황색 -의 셔츠를 입은 네 친구는 베드로에 대한 구타를 잠시 멈추기에 이르렀다. 베드로는 유혈 혁명의 종결을 기대하며 슬며시 고개를 들지만, 네 친구는 그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동이란 대가도 없이 부모의 풍족한 부를 누리던 부르주아지가 공포 속에 네 사람의 혁명가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미, 미안해. 다음에는 잘 준비할게."
 "입 닥쳐, 병신아. 당장 오늘 발매하는 게임사는 데 돈이 모자라잖아.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아, 이런. 혁명은 혁명이되 변질된 혁명이다.

 아무튼, 서슬퍼런 목소리에 베드로는 다시 무릎 사이로 고개를 박았다. 누군가가 거북이처럼 움츠러든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질 때까지. 그리하여 이 이차원적이고도 본능적인 행동을 종결지어줄 때까지.
 손길을 구타의 전조로 생각했던 베드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것은 주먹이나 팔 따위, 원초적 폭력의 매개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아닌, 조그맣지만 부드러운 소녀의 음성이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뒤이어 빨간 티셔츠의 고함이 들린다.

 "어, 저 새끼는 또 뭐야?"

 베드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키 작은 여자 아이가 햇볕을 등진 채 베드로를 내려보고 있었다. 베드로의 낮은 눈높이 탓에 태양이 아이의 머리 뒤로 후광처럼 빛났다. 후광의 빛 사위가 드리워 넘실대던 얼굴의 그림자 속에서 베드로는 은은하고 자애로은 미소를 살필 수 있었다.

 "왜 여기에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어? 자, 어서 일어나."

 얼핏 보기로 2학년 즈음이나 되었을까. 왠지 슬퍼 보이는 눈에는 더불어 강단이 있었고, 대뜸 저보다 덩치 큰 고학년 학생에게 손을 내미는 동작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얼결에 손을 잡는 베드로가 아무런 수치를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사이 네 아이는 흉흉한 기세로 소녀에게 다가섰다. 검은 티셔츠의 아이가 소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자 베드로는 자신의 구원자가 해를 입지는 않을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야, 너는 뭔데 쓸데없이 참견질이야, 죽고 싶어? 이 시발녀..."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뜻밖에도 저 검은 티가 고개 돌린 소녀와 눈을 마주하더니 말꼬리를 흐려버린 것이다. 베드로는 검은 티의 표정 속에서 평온을 보았다. 그는 두려움에 경직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쓱싹하고 적의를 지워버린 것 같았다. 폭력과 광기의 감정이 끊임없이 꿈틀대던 그의 얼굴 위에 결코 어울리지 않을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그건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화분처럼 뒤늦게 소녀와 눈을 마주친 다른 아이들의 얼굴에도 번져나간다.
 소녀는 평온히 선 네 사람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어. 그런데도 오빠들은 공연히 마음이 앞서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네."

 소녀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교사로 이끌었다. 멍하니 선 네 아이의 시야로부터 벗어날 즈음에야, 베드로는 공연히 쑥스러운 마음에 소녀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소녀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돌아보자 베드로는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인사를 건넸다.

 "구해줘서 고마워."
 "뭘."

 소녀는 다가와 옷에서 흙과 먼지 털어내는 일을 도와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넌 누구니?"
 "나?" 베드로의 어눌한 목소리에 반해 소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쾌활하다. "난 정규리야. 2학년 1반. 오늘 여기로 전학 왔어! 오빠는?"
 "난 박대로. 5학년이야."

 이때 베드로는 규리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좀 전에는 경황도 없었거니와 규리가 햇볕을 등진 채로 첫 대면을 하여 잘 몰랐는데, 이렇게 나와서 보니 피부색은 조금 어둡고 얼굴의 느낌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낯선 느낌 속에 다가오는 경외감이랄까. 그런데 혼란스럽게 머릿속을 오가던 이 신비한 감정을 규리는 몇 마디 말로 일축해 버렸다.

 "오빠는 나 같은 사람 처음 보나 봐? 우리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라 그래."
 "아, 어. 어, 아니."

 '나 같은 사람'이라는 말로 규정된 그 괴리 탓에, 베드로는 자신의 무례한 시선에 소녀가 기분을 상하지는 않았는지. 당황도 하고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네게 느낀 신비한 감정들은 그저 혼혈이라 그랬던가. 그렇다면, 그리 신기하고 놀랄 일은 아니었는데. 베드로의 학교에는 이미 규리 같은 혼혈 아동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그리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규리는 그의 생각을 살핀 마냥 해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by Qui-gon | 2008/07/08 14:42 | [소설] 降臨 | 트랙백 | 덧글(0)

降臨 #3-2: 적 그리스도의 출생 신고

#3-2: 적 그리스도의 출생 신고. ((퇴고일: 2008. 7.8))

 "엄마, 나 학교 갈래."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민규의 나이 일곱 살. 적 그리스도는 계획의 첫 단계에서 가정환경이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이외수는 말했다. '모든 성공은 장애물 너머에서 그대가 오기를 기다린다.'
 민규의 끈질긴 설득과 민규를 아끼는 창녀들의 동참- 민규의 실질적인 어머니 역할을 해온 그녀들은 민규의 영민함을 들어 그 의견에 수긍했다-을 지켜보던 포주가 피식 웃으며 민규 모에게 동사무소라도 가서 출생신고부터 하라고 일러주었다.

 민규 모는 민규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가슴이 깊이 팬 헐렁한 원색 상의 위로 속이 비치는 하늘하늘한 얇은 레이스 복. 아래로는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차림이었다. 동사무소에서 순번대기표를 뽑아 의자에 앉아있으려니 그녀의 꼬고 앉은 다리로 남자들의 음란한 - 드물게는 순진한 - 시선이 슬금슬금 기어들었다. 민규 모는 껌을 짝짝 씹으며 그런 남자들을 태연히 쳐다보았는데 시선이라도 마주칠라면 상대는 얼굴을 붉히거나 무안해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런 모습을 보며 냉소를 흘린다.

 이를 못마땅하게 살피던 동사무소의 젊은 여직원이 우연히 민규 모를 맡게 되었다. 순번대기표란 일종의 사다리 타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대기석에 있던 잘생긴 남자의 등초본 발급을 맡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반쯤 정신 나간 주민의 앞뒤 없는 민원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주1) 순발력이 필요한 예측불허의 싸움. 앳된 동사무소 9급 공무원에게 이 날은 왠지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애 출생신고 하고 학교 좀 보내려고요."

 냉랭한 목소리의 여직원은 슬며시 눈길을 민규에게로 돌린다. 어린 듯하면서도 어른스럽고 순진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장난기 가득한 민규의 이중적인 눈길. 그러나 이목구비 또렷하고 똘똘하게 생긴 얼굴은 제법 호감이 가는 상이다. 그 때문인지 민규 모에게 품은 애매한 적개심이 어느덧 호기심과 동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너는 이름이 뭐니?"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에 민규는 안심하며 대답했다.

 "민규. 안민규예요."
 "몇 살?"
 "일곱 살이요."
 "애가 일곱 살인데 이제 출생신고를 하세요?"
 "너 일곱 살이었니?" 민규 모는 껌을 짝짝 씹으며 여직원을 달한다. "암튼 그게 뭔 상관이람. 바쁘니까 빨리 출생 신고나 해줘요."

 민규 모는 여직원이 건네 준 서류 때문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깊게 파인 상의로 가슴이 드러나자 여직원의 뒤쪽을 서성이던 동사무소 직원이 침 삼키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꼴깍. 여직원이 휙하고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남자 직원은 허겁지겁 서류를 챙겨들고 자리를 옮겼다. 입꼬리를 올려붙이던 민규 모는 자신의 한자 이름란에 이르러 펜을 휙휙 돌렸다.

 "넌 나이도 어린 게 왜 학교는 간다고 해서 엄말 고생시키니?"

 민규 모가 민규를 애꿎게 나무라자 여직원은 상황을 눈치 채고서 주민등록증을 찾아보라 권했다. 민규 모가 꺼낸 주민등록증. 안민희. 나이는 스물셋으로 여직원과 동갑이다. 도대체 이 여자는 애를 언제 낳은 거야? 여직원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민규 모의 바쁜 손길은 아이의 부친 인적란에서 다시 한번 멈췄다. 이때는 민규에게 면박을 주는 대신 핑크빛 싸구려 핸드백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들었는데 착신음 끝에 들려온 목소리는 얼핏 듣기로 포주의 것인 듯싶었다.

 - 어, 민희냐. 민규 출생신고는 다 끝났고?
 "아직 안 끝났어. 삼촌 민증번호나 좀 불러줘."
 - 갑자기 내 민증번호는 왜?
 "애 아빠 인적사항을 적어야 해. 근데 그게 누군지를 알아야지. 그냥 삼촌 이름으로 적게."
 - 뭐? 이 꼴통 같은 년이! 누구 불알 쌈 싸먹는 소리야!
 "왜? 삼촌이 애 아빠일 수도 있잖아."

 쨍쨍거리는 통화 끝에 민규 모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닫아버렸다.

 "싫음 말지. 왜 아침부터 욕질이래, 미친놈."

 그러고는 여직원에게 무심하게 시선을 꽂는다.

 "애 아빠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데, 그냥 안 적으면 안 돼요?"

 잘못 듣기로는 근친상간이 의심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주2) 그러나 일의 전후를 짐작한 여직원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였다.

 "그러세요."
 "그럼 진작에 그렇다고 말해주지. 애꿎게 욕만 먹었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기재절차를 마치며 민규 모가 직원에게 물었다.

 "근데 이거 끝내면 얘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거죠?"
 "민규 나이는 올해 일곱이잖아요. 내년에나 갈 수 있겠죠."
 "어? 나 올해 가야 하는데."

 이건 사활이 걸린 큰 문제였고 놀란 민규는 여직원에게 사정했다.

 "누나, 저 올해 꼭 학교에 가야 해요."
 "이건 법으로 정해진 거야. 그리고 학교 일찍 가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여직원은 친누나라도 되는 양 자상하게 말했지만, 일에 대한 태도에는 의외로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민규는 못미더운 어머니에게 일을 맡기는 대신 스스로 그녀를 설득할 수 있는 여러 기술을 궁리해보았다. 상대는 앳되지만 사회에 막 나와 연애와 섹스에 한창 관심이 많을 여자였다. 프렌즈나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개방적인 성문화를 담은 현대 드라마는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들의 성적 기대감을 고양시키곤 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민규는 자신의 눈에 음란하고도 매혹적인 감정을 투사했다. 그의 교묘하게 제어된 성조의 목소리가 여직원의 귓가를 스쳐 성감을 자극했다.

 "누나, 전 학교에 가야 한단 말예요."

 이 짧은 한마디는 여직원을 돌연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에 도취시켰는데 어린 민규에게서 발산되는 교묘한 성적 매력이 넝쿨처럼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깊은 곳으로 뻗쳐 들어오고 있었다.
 어, 갑자기 내가 왜 이러지? 얘는 애잖아. 일곱 살 꼬마애!
 눈빛이 묘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인간들이 서브리미널 효과라 부르는 부정한 존재들의 오래된 기술 덕에 학교에 가고 싶다는 평범한 말 한마디가 여직원의 가슴을 뛰게 하고 몸을 찌릿한 전류를 흘려보내는 것이다. 민규의 눈빛과 말 속에 숨은 음탕한 술수를 알지 못한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가까스로 유혹을 거부했다.

 "아, 안돼."

 그러나 상대의 동요를 눈치 챈 민규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고삐를 죄일 차례라는 것을 알았다. 의자를 밟고 올라선 민규가 접수대 위로 몸을 반쯤 기울여 여직원의 귓가로 속삭이듯 말한다.

 "누나, 절 학교에 보내주면 기분 좋게 해드릴게요."

 아아, 난 변태인가 봐. 허락해버릴 것 같아. (*주3) 눈을 동그랗게 뜬 여직원이 일곱 살 남자 아이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함락 직전의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때 민규의 눈앞으로 빛이 번쩍였고 민규 모는 아이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끌어냈다.

 "미친 새끼.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 갖고는. 서류 다시 줘요. 내가 생년월일을 잘못 적었어. 얘는 올해로 여덟 살이야."

 물론, 민규는 일곱 살이었고 민규 모는 아들의 교육에 대해 아무런 관심과 열정이 없었다. 뒤늦은 출생신고로 10만원이 넘는 과태료가 추징되었을 때 민규의 계획에는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지만, 어찌되었건 민규는 조기 입학에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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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는 대기 열에 선 사람이 접수인을 마주하게 되는 역의 상황에서도 성립하는데, 이 경우에는 여러 장의 순번 대기표를 확보해 비교적 자연스럽게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가능하다.

*주2) 한국의 매춘 사회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유사가족적 관계를 중요한 특징으로 삼는다. 매춘부들이 서로를 언니나 동생으로 부르거나 혈연관계가 없는 포주를 '삼촌'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유사가족적 유대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풀이된다.

*주3) 남성 독자분들의 성공적 연애 사업에 도움을 주고자 주석을 덧붙인다. 여직원의 반응을 이끌어낸 민규의 서브리미널 신호를 해석하면 '나랑 빠구리 뜨자. 돼지 쌍년아'가 된다.
(*For english translator: This sentece which is a famous hunting ment in S.Korea must be translated as "Let's Sex. Pig you bitch.")

by Qui-gon | 2008/07/08 14:22 | [소설] 降臨 | 트랙백 | 덧글(0)

降臨 #3-1: 열두 찐따와 십삼 일의 금요일.

#3-1: 열두 찐따와 십삼 일의 금요일.

 민규에게 사전 정지(整地) 작업은 중요했다. 경쟁자에게는 그의 추종자들이 흔히 사도라 부르는 열두 찐따가 예비되어 있었다. 하나도 버거운데 무려 열셋이라니! 민규는 불현듯 다섯 살 무렵, 그의 어머니가 생각 없이 보여준 13일의 금요일이란 영화를 떠올린다. 제이슨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열셋이라는 숫자는 참으로 저주스럽고 흉물스러운 숫자인 것이다.

 지난 2년의 간극.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찐따가 경쟁자에게 들러붙었을까? (물론, 민규는 몰랐지만, 최소한 빌립보는 아직 들러붙지 못했을 것이다.)

 찐따들은 명성답게 한번 들러붙은 후에는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유다를 배신케 한 악마가 지금까지 호사를 누리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민규가 벌여야 할 정지 작업은 이들을 먼저 찾아내어 타락시키는 일이며 그리스도에게 합류하는 것을 늦추는 일이고 그들에게 회의주의를 주입하는 일이었다! (*주1)

 하지만 그는 아직 이 열두 찐따가 어떤 나이에 어떤 성별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알지 못했다. 갈 길이 멀었다.

 그들 중에 니체의 책 몇 권을 권해도 좋을 어설픈 지성이 있다면 일은 한결 쉬울 것이다. 니체는 지옥의 형제들도 감탄하는 언변을 가졌다. 예전의 세리 같은 세무공무원이나 열심당원 같은 과격분자라면 걱정할 일도 없을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저런 종자들은 저절로 타락할 가능성이 크다.(*주2) 전처럼 순박한 어부들의 경우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했는데 이것이 다소 어려웠다. 2천 년 전에 한 악마가 선택한 방법은 어획량을 줄여 세상과 신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키는 것이었는데 지옥에서는 꽤 신선한 방법이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뼈있는 유머 한 마디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얼마나 놀라운 센스인가? 실제로 이 멘트는 경쟁자의 것일지언정 지옥에서 오랫동안 유행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낚는다’라는 말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그 말이 가진 힘은 유효할 수 있다. - 2천 년 전의 예수는 이제와 생각해도 확실히 난 적이었다.

 민규는 한편으로 정지 작업이 원만히 이행되지 않을 경우도 따져야 했다. 경쟁자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랐고 언제 마주치게 될지를 알 수 없었다. 이에 대비하자면 우선 사회로 나가야 했는데 특히 학교라는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접근해 추종자를 모으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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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지옥의 형제들은 인간들의 사상적 발전을 자극하여 절대적 신성이나 가치를 해체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는 사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기초 연구와 작업이 시작되었다.

*주2)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지옥의 통계일람'에는 지난 60년간 세무공무원의 78%, 과격한 급진좌파 또는 극우보수 운동가의 98%가 이르든 늦든 타락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by Qui-gon | 2008/07/08 13:45 | [소설] 降臨 | 트랙백 | 덧글(2)

降臨 #2: 빌립보의 계시; 그에게 죄를 묻지 말라.

#2: 빌립보의 계시; 그에게 죄를 묻지 말라. ((퇴고일: 2008. 7. 8))

 적 그리스도는 몰랐지만, 사실 그에게도 몇 가지 행운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빌립보에 관한 것이다.
 과거 빌립보는 예수에게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제자였다. 오늘날 그의 어린 현신은 겨우 중학생에 지나지 않았으나 신앙과 합리적 사고 사이에 번민을 하기로는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는 어느 날 잠을 자던 중에 느닷없는 계시를 받게 되었다. 홀로 자던 작은 방은 어둠 속에서도 더욱 어둑해지다 천장 위로 한줄기 광휘가 비쳐들며 무겁고도 장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사명을 다 할 준비가 되었느냐? 답하거라.>

 빌립보는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으므로 돌연 잠에서 깨어 경황이 없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부터 이해하려 애썼다. 어째서인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기회가 한번뿐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다만 무슨 사명을 다하라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로 많은 회의와 번민 속에 교회 생활을 마감한 빌립보는 불현듯 이것이 악마의 목소리가 아닌가를 의심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은 생생한 지옥 얘기는 무의식 중에 교회를 나가지 않던 그에게 부당한 죄책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어리지만 합리적이었던 빌립보는 내용도 알지 못하고서 계약을 하는 것이 부당하다 여겼다. 흉흉한 세상의 뉴스마저 떠올랐다. 악마의 목소리는 교묘할 것이다. 저것이 신의 목소리를 가장해 내 쇠락한 믿음을 시험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빌립보는 본능적으로 반문했다.

 "그건 어떤 내용인가요?"

 " 빌립보가 생각한 대로 대답의 기회는 한번뿐이었고 반문은 그리 좋은 대답이 아니었다. 믿음이란 빈곤한 근거와 불신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을 때 오롯이 빛나는 것이다. 광휘와 어둠이 걷히매 방 안은 다시 평온을 찾았다. 이제 그에게 기회는 일 년 후에나 찾아 올 것이다. 주일학교의 목사가 이런 결과를 의도하고 지옥불과 악마로 어린 빌립보를 위협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찌 되었건 사도 한 사람의 합류가 늦어졌고 빌립보 스스로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당부하건대 우리는 목사를 탓할지언정 자세한 계약의 내용을 설명해주지 아니한 주님을 탓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보험사 직원이 아니며 (*주1) 셀 수 없는 세월동안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한결같이 그래 오셨으므로.
 노아와 짐승들을 구하고자 하셨다면 방주를 만들라 지시하는 대신 처음부터 완성품을 내려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을 사랑했다면 광야를 떠돌게 하는 대신 그들을 손수 교화시키고 “Beam them up, Gabriel!"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빌립보에게 편안한 시간을 골라 방문해 그가 행해야 할 일과 책임들에 대해 한 시간쯤 차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늘 그래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불친절을 탓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빌립보는 오밤중의 갑작스런 소동이 끝나자 조심스럽게 눈을 감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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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물론 모든 보험사 직원이라 하여 규약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들은 주로 형광펜을 사용해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고 가입을 권유하는데, 이때 보험 상품의 불리한 점에는 밑줄을 잘 긋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보험사 직원을 친절하고 꼼꼼한 설명의 대명사로 상정해 주님의 불친절과 대비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닐 수도 있겠다.

*주2) 스타트렉에서 물질 전송을 할 때 내리는 명령인 Beam me up, Scotty.

by Qui-gon | 2008/07/08 13:33 | [소설] 降臨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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